이병철, 박태준에 "삼성중공업 줄테니 책임지고 사라" 할만큼 신뢰
선ㆍ후배로 26년 간 우애 나눠…각자 호도 호암ㆍ청암 나란히
광양제철소 설립 때 이병철 주선으로 신일본제철 회장 만나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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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재창당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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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湖巖)과 청암(靑巖).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호다. 13일 타계한 박 명예회장과 이 창업주는 쌍둥이 같은 호를 쓸 만큼 생전에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경제 현대화의 초석을 놓은 '1세대 경제인' 공통점 외에 개인적으로도 선ㆍ후배 관계를 맺으며 평생 우정을 나눴다.

박 명예회장은 2007년 호암 20주기 추모식에서 "그리운 (호암) 선배님"으로 시작하는 추모사를 직접 낭독했다. 그는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이 창업주를 처음 만난 이후 1987년 11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6년 동안 많은 격려와 힘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박태준 회장에 "삼성중공업 가져라"
실제로 1980년대 초 포스코가 광양제철소를 지을 당시 일본 철강업체들은 '부메랑' 논리를 내세우며 기술 이전을 거부하고 포스코를 견제했다. 이때 이 창업주가 일본 가루이자와 휴양지에서 일본철강연맹회장인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회장과의 만남을 주선해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 창업주는 생전에 박 명예회장을 가리켜 "경영에선 불패의 명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박태준 회장은 군인의 기(氣)와 기업인의 혼(魂)을 가진 사람" 이라며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한때 삼성중공업을 박 명예회장에게 줄 테니 받아가서 책임지고 살리라는 권유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박 명예회장은 "과분한 선물을 어찌 받겠냐" 며 "내 노후를 염려한 인간적 애정만은 간직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인연, 이건희 회장ㆍ이재용 사장까지 이어져

이 창업주가 생전에 박 명예회장에 보낸 마지막 선물은 그의 회갑기념 문집에 실릴 '목욕론' 철학에 대한 덕담이다. 1970년대 중반 섬유수출이 한창이던 당시 박 명예회장이 해외에 나가 백화점에 들렀지만 한국산 섬유제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 제품은 바느질이 신통치 않고 소매 등이 맞지 않아 하급품을 취급하는 지하실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귀국 후 박 명예회장은 "자기 몸이 깨끗하지 않으면 입은 옷이 더러워도 더러운 줄 모른다. 그러나 목욕을 깨끗히 하면 주위의 지저분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결과는 당연히 제품의 질로 나타난다"는 유명한 목욕론을 피력했다.

이 창업주는 이에 대해 "'목욕'에 관해 박 회장은 나름대로의 지론을 가지고 있다. 불결한 작업자가 무질서한 공장에서 제대로된 제품이 나오기를 바란다면 그야말로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 며 "그의 목욕론은 과연 탁견"이라고 칭찬했다. 박 명예회장은 이 창업주가 칭찬해준 이 글을 평생 그의 책상에 간직했다고 고백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박태준 회장에 "삼성중공업 가져라"
두 사람의 인연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삼성 관계자는 "박 명예회장은 이 회장의 멘토라고 할 만한 분이었다" 며 "그만큼 한국경제의 거목이셨다"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과 이 회장은 호암 추모식을 비롯해 재계 주요 자리에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일본 와세다대에서 수학한 동문이다. 박 명예회장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이 회장은 곧바로 빈소에 화환을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박 명예회장이 일군 포스코와 삼성도 끈끈한 사업 협력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올해 두 차례 회동을 갖고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지난 9월 정 회장이 삼성전자 서초사옥을 방문했을 때는 이 사장이 직접 그를 맞아 밤 늦게까지 화기애애한 만찬을 갖기도 했다. 삼성 관계자는 "지난 4월 이 사장이 포스코 사옥을 방문한 데 따른 답방 차원이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경쟁력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였다"고 당시의 만남을 설명했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