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기 위한 혁신은 집어치워라"…돈되는 R&D에만 집중
이 회사가 연구·개발(R&D)에 들이는 비용은 경쟁업체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짠돌이 기업’으로 불린다. 특허 수도 다른 회사보다 많지 않다. 하지만 기술혁신은 항상 이 회사가 주도한다. 기술투자의 과실도 단기간에 따먹는다. 회사 매출의 20%가량이 3년 내 출원한 특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CEO)는 항상 “제품은 선반 위에 전시하려고 개발하는 게 아니다. 소비자들이 필요하니까 만드는 것이다. 당장 돈이 되는 핵심 기술 개발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독일에 있는 이 회사 이름은 헤라이우스(Heraeus). 귀금속 거래, 중개, 제조까지 모두 하면서 귀금속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회사다. 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는 “세계 어느 기업보다 금값이 변하는 냄새를 빨리 맡고 어떤 경쟁자보다도 귀금속시장에서 재빨리 움직인다”고 평했다. 금 은 백금 같은 귀금속시장의 ‘빅 플레이어’다.

1851년 설립 이래 160여년 동안 귀금속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왔다. 헤르만 지몬 독일 마인츠대 교수는 ‘히든 챔피언(숨겨진 챔피언)’의 하나로 주저없이 이 ‘알짜기업’을 꼽기도 했다.

◆혁신도 싸고 효율적으로

헤라이우스는 ‘기술 종합기업(테크놀로지 콘체른)’을 지향한다. 지난해 1790억유로(268조원) 규모 귀금속을 거래했고, 첨단 귀금속 가공기술 분야에서만 41억유로(6조4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세계 최대 귀금속 거래 회사 중 하나다.

귀금속 거래시장은 누구나 돈만 있으면 참여할 수 있다. 이런 레드오션에서 살아남기 위해 헤라이우스는 금·은과 관련해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길을 선택해왔다. 지속적인 기술혁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헤라이우스는 이를 위해 단순히 R&D 투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비용 대비 효율이 가장 좋은’ R&D를 하는 길을 택했다.

헤라이우스 기술혁신의 특징은 ‘혁신을 위한 혁신’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것이다. 모든 R&D 활동은 수익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며, 비용 대비 효용을 최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어설픈 혁신은 돈만 많이 들 뿐 아니라 경쟁자들이 쉽게 모방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헤라이우스 내 25개 연구센터의 총 R&D 비용은 매출의 2.4% 수준이다. 경쟁 업체인 벨기에 우미코어(6.9%), 영국 존슨매티(4.9%)의 절반 이하다. 직원 1인당 R&D 투자비용도 5089유로로 경쟁 업체에 크게 못 미친다. 대신 개발한 기술의 효율성은 탁월하다. 헤라이우스는 특허를 출원할 때 완전히 ‘독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핵심 특허, 성과가 보이는 특허에만 집중한다. 경제적 이득을 바로 얻는 R&D에 집중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출원한 특허에서 곧바로 ‘과실’을 따먹고 있다.

헤라이우스의 기술개발 전략이 잘 드러나는 분야는 은 합성물 시장이다. 헤라이우스는 2009년 은 합성물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 범용 은 합성물은 흔한 제품이었다. 하지만 헤라이우스는 첨단 제품에 특화한 은 합성물을 내놓으며 9개의 시장을 새로 만들었다. 태양열 집열판 등에 특화한 은 합성물 등을 선보이자 관련 분야 매출이 1년 만에 ‘0’에서 3000만유로로 급증했다.

회사 측은 부족한 R&D 투자는 내부 의사소통 과정을 단순화하는 것으로 보완하고 있다. 중앙연구센터장은 수시로 최고경영진과 의견을 나눈다. 프랑크 하인리히트 최고경영자(CEO)는 “CEO가 직접 R&D 분야에 관여하고 참여할 때만 그 성과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 거래에서 살아남아라

헤라이우스가 이처럼 ‘고효율 혁신’에 집착하는 것은 귀금속 거래시장이 대표적인 ‘레드오션’이기 때문이다.

헤라이우스가 주로 다루는 금과 백금, 팔라듐, 로디움은 겉으로 보기엔 ‘매혹적’인 사업 아이템이지만 실상은 ‘규모의 경제’가 좌우한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귀금속 거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도 낮고, 순식간에 수백만유로 규모의 손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시장이다. 반면 가격 변동폭이 크기 때문에 평균 수익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어느 순간 거대한 플레이어가 뛰어들면 시장 판도가 변할 수 있다.

이런 시장에서 살아남고 트렌드를 주도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위르겐 헤라이우스 이사회 의장은 “창업 초기부터 금·은을 가장 많이 거래하는 업체가 아니라 금·은을 가장 잘 다루는 업체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움직여왔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헤라이우스는 금이나 백금 등의 단순 거래부터 △공업용 특수귀금속 가공 △치과용 금제품 △의료용 귀금속 제품 △특수 유리 △귀금속 소재를 이용한 특수 광센서 생산까지 120여개 분야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120개 사업에는 회사의 역사가 담겨 있다. 대장간을 운영하던 창업자 빌헬름 칼 헤라이우스는 대규모 백금용융 및 순수백금 추출 기술로 명성을 쌓았다. 19~20세기 중반까지는 귀금속에서 의학용 철분화합물 추출, 순수 플루오린화수소산 생산, 루비듐 등 화학산업용 특수물질로 제품 라인업을 확대했다.

금속 가공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키웠다. 1920년대에는 만년필 촉에서 잉크가 일정하게 나오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현재 세계 최대 만년필 촉 생산업체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머리카락 지름 5분의 1 두께의 마이크로칩용 황금전선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휴대폰, 자동차, 첨단 인공위성과 입자가속기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도 만든다. 헤라이우스 이사회 의장은 “우리는 금·은과 관련해서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길 원한다”며 “기술혁신이 헤라이우스 유전자에 내재된 최고의 경쟁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귀금속에는 국경이 없다”

헤라이우스는 2000년대 들어 해외 진출도 강화하고 있다. 전체 매출의 73% 이상을 독일 이외 지역에서 거두고 있다. 전 세계 25개국에 각종 귀금속 화합물 현지 생산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헤라이우스는 최근 아시아지역 생산을 늘리고 있다. 전체 매출의 30%를 중국 인도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일구고 있다. 독일을 제외한 유럽 지역(15%)과 북미(17%)의 두 배 수준에 이른다.

지난 9월 싱가포르에 은 화합물 관련 생산시설을 만든 데 이어 이달 20일에는 대만에 태양광 패널용 은 화합물 부품 생산시설을 대폭 확대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