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늪에 빠진 직장인] (끝·3) 출근길 '가슴 답답증'…EAP 상담 받고 결근율 78% 줄어
외국계 G제약사의 이모 과장(35)은 회사가 인정하는 만능 영업맨이지만 요즘 속이 곪아있다. 올해 영업 8년차에 접어들면서 간과 쓸개는 물론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는 영업맨 수칙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객인 의사들의 터무니없는 요청을 받을 땐 거절도 못하고 끙끙대기 일쑤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술자리를 마치고 새벽에야 집에 돌아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살아서 뭐하지"라고 자조한다.

직장인 우울증이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지만 기업이나 정부 차원의 대책은 미미하다.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는 것을 경쟁사회의 그림자이자 선진국으로 가는 '성장통'으로 인식하면서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내기업 관심 태부족

과도한 스트레스가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낳고 다시 산업재해나 자살을 촉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우종민 인제대 백병원 정신과 교수는 "정신문제 관련 고위험군의 비율을 전체 근로자의 3.6%,환자를 0.4%,이들의 생산성 저하를 30~50%로 산정해 직무 스트레스와 관련 직 · 간접 손실비용을 추산해보니 연간 13조1623억원에 달했다"며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이 직원들의 마음 건강 챙기기에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취업사이트 잡코리아의 조사 결과 직종별로 생산직은 연속 · 단순 작업에서 오는 긴장과 무력감,영업직은 실적달성에 대한 강박감과 자존감 상실,금융직은 수치화된 목표달성과 그에 따른 인사고과,관리직 · 사무직은 치밀한 일처리 및 상사와의 관계설정에서 스트레스가 오는 경향이 높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대처는 초보적인 수준이다. 특히 중소기업 쪽이 더 심각하다. 한국EAP협회는 지난 7월 300인 이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366건의 상담을 진행한 결과 13.1%가 당장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질병가능군으로 분류됐다고 밝혔다.

송성호 팀장은 "대기업과 공기업 근로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반면 대다수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당장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들어 죽고 싶다고 토로할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는 "대기업은 요식행위일지라도 인적자원 관리 차원에서 직원의 정신건강 관리에 신경 쓰지만 중소기업들은 아예 그런 인식도 없다"며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간단한 상담으로도 증상이 크게 호전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중소기업 경영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직원들을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국기업은 체계적으로 대응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기업들은 임직원의 정신건강 관리를 돕기 위해 '근로자지원프로그램(EAP)'을 잇따라 도입하고 있다.

한국EAP협회에 따르면 미국엔 50인 이상 사업장의 33%가 EAP를 도입했고 EAP를 수행하는 교육기관이 1만2000개에 이르고 있다.

다국적 소비재 기업인 존슨앤드존슨(J&J)은 1978년 장거리 수송업무를 맡은 운전기사 3만3000명 중 51.5%에 해당하는 1만7000명이 운전 도중 졸림과 피로현상을 호소하고 교통사고가 빈발하자 EAP를 도입했다. EAP 실시 직후 결근율이 78% 감소하고 정신건강 상태가 지표상 38%가량 개선되는 성적을 거두자 2006년에는 57개국 466개 사업소,전체 고용인력의 75%에 EAP를 확대 적용했다. 현재는 전 세계 J&J 임직원의 88%가 EAP 혜택을 받고 있으며 한국얀센 등 국내 J&J 계열사는 2008년 7월부터 이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 밖에 3M,유나이티드에어라인,킴벌리클락 등이 EAP 도입으로 투입 비용 대비 6~16배의 의료비 산업재해보상비 등 비용절감 효과를 거뒀고 출근율과 생산성이 30~40% 향상됐다.

◆개인이 행복해야 기업도 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에도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기업 규모와 직종에 따른 맞춤형 EAP를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EAP 등을 통해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한 사원은 신속하게 휴직이나 업무량 경감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또 직장 건강검진에 정신건강 체크를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정신의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우울증에 따른 자살 방지 등을 위해 직장 건강검진에 우울증 검사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나카스마 아키라 후생노동상이 지난 4월 "우울증 검사가 가능하도록 법률 검토에 나서겠다"고 발언한 뒤 대책을 마련 중이다. 후생노동성은 자살 및 우울증 프로젝트팀을 결성해 공청회를 여는 등 관련 법안 입법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입법에 나서자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연간 1회 실시되는 직장 건강검진에 우울증 검사를 도입하면 노동자들이 우울증으로 인해 업무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정부는 이에 따라 정기검진시 우울증 검사를 실시하는 방법 대신 수면과 식욕,권태감 등에 관한 간접조사를 통해 우울증을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과 교수는 "사내에서 직급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 코칭과 멘토링이 이뤄져야 한다"며 "괴로울 때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을 갖고 있다는 것은 든든한 '보험'에 든 것과 다름없다"고 조언했다.

정종호/이정호 기자 rumba@hankyung.com


◆ EAP

employee assistance program. 서구 선진 기업에서 근로의욕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신건강 관리에 초점을 두고 시행하는 각종 지원 프로그램을 말한다. 1차적으로 임직원의 성향과 욕구를 파악한 뒤 심층상담 및 심리검사를 거쳐 진로 설정,경력관리,대인관계 설정,스트레스 관리요령을 컨설팅해준다. 적극적으로는 결혼 채무 보육 등 개인적인 고민이나 법률 · 재무적 문제까지 회사가 일정 부분 책임지고 풀어준다. 회사는 프로그램 시행으로 인한 업무 성과 개선 여부를 수시로 피드백해 보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