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대기업에 근무하는 A부장(51)은 매년 한 차례 올리는 그룹 회장 보고서에서 필수 자료를 누락했다. 직속 상무는 "그런 식으로 할 거면 그만두라"고 경고했다. 회복하기 어려운 과오를 저지른 A부장은 5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40대 초반 때 미국 지사에서 가족과 함께 4년간 근무하다 귀국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은 '혀 굴리는' 발음을 한다며 놀려대는 친구들의 '왕따'를 이겨내지 못하고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결국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1년만 있다가 돌아온다고 기약했지만 함흥차사다.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돌아올 생각조차 않는다. 되레 미국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고 떼를 쓴다. A부장은 기러기 생활에 지쳐 1년 전부터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 하지만 아내나 아들과 전화할 때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다. 술에 의지해 잠드는 날이 부지기수이고,다음날에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허다하다. 업무는 이미 엉망이다.

기러기 아빠들이 우울증 늪에 빠지면서 직장 내 골칫덩어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불거지면서 조직원 간 갈등요인을 제공하고,생산성을 떨어트리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조기유학 열풍의 후유증 탓이다.

◆조기유학 후유증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해외로 출국한 초 · 중 · 고교 학생 수는 2000년 4397명에서 2008년 2만7349명으로 6.2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2년 이상 장기 체류하는 비중이 30%에 달하고 해외 이주 또는 파견동행(해외 상사원 · 외교관 등)은 통계에 잡히지 않아 훨씬 많은 수가 조기유학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대학 · 대학원 학위과정 학생도 14만4580명에 달한다. 이에 따라 교육계에선 약 18만명이 어린시절 조기유학을 떠나 외국에 남아있고 이로 인해 최소 5만 세대가 '기러기 가족'이 됐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병철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정신과 교수는 "중년 남성들은 무기력증과 성기능 감퇴로 축 처지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과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한국사회의 통념상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 소외감과 우울증,스트레스의 강도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러기 아빠인 B이사(52).그는 1주일에 하루 이틀은 근무가 끝나면 "우리집에 가서 한 잔 하자"며 직원들을 불러 모은다. 집이 널찍하고 고급 양주와 안주를 내놓는 덕분에 처음에는 제법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사무실이 있는 서울 여의도에서 경기도 일산의 자기집까지 직원들을 끌고 가 서너 시간 이상 폭탄주를 돌리다 보니 귀가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두 배로 늘고 다음날 숙취가 심해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끼친다는 불평이 부하 직원들 사이에 나왔다. 더욱이 B이사는 거나하게 취하면 예쁜 C여직원에게 진한 농담을 건네 성추행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다.

D대기업의 인사담당 임원은 "기러기 아빠가 점차 늘어나고 있어 직원들의 근무의욕이 저하되고 업무성과에도 간과할 수 없는 악영향을 미쳐 회사경영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며 "올 상반기에 이들을 대상으로 아침식사를 제공하고 심리컨설팅을 진행하는 등 회사에서도 많은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러기 아빠들이 중견 간부 또는 임원급이어서 함부로 개인사에 개입하는 느낌을 줄까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고 설명했다.

◆돈도 직장도 가족도 잃었다?

기러기 아빠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핵심포인트는 '돈버는 기계'로 전락했다는 피해의식이다. 더욱이 장기간의 해외송금으로 경제적으로 점점 궁핍해지고 가족에게 버림받아 돌아갈 날개마저 잃어버린 '펭귄 아빠'가 돼 버렸다는 의식 수준에 이르면 우울증 불안증 수면장애에 걸리게 된다. 직장에서의 업무성과가 현저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드물지만 B이사처럼 주위 사람에게 가학적인 피해를 주는 경우도 생긴다.

이에 더해 생활패턴이 무너지면 불규칙한 식사로 인한 영양결핍 체력저하 비만 등이 나타나고,만성두통 소화불량 어지럼증 등 신체화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뇌심혈관질환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스웨덴 우메오대의 연구에 따르면 기혼남성이 가족과 떨어져 살 경우 자살률은 2.3배,알코올 및 약물 중독에 의한 사망률은 4.7배,심장질환 사망률은 1.7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러기 아빠들은 자식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만큼 모범적인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독거 기간이 길어지면서 습관성 음주나 외도 등 일탈 행동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기러기 가족을 위한 인터넷 카페의 한 회원은 "30여개의 기러기 카페와 블로그에서 인사를 나눈 남녀 회원들이 따로 오프라인에서 만나 주말산행을 하거나 술자리를 갖다보면 성적 일탈로 이어지는 사례가 발생한다"고 털어놨다. 몇 년 전부터 서울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늘어난 '데이트바'는 여종업원과 독립된 공간에서 1 대 1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룸살롱 등에 싫증을 느낀 기러기 아빠들이 많이 찾는다.

채정호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과 교수는 "행복보다는 학벌 · 직업 등 외형적인 성공만을 지향하는 의식 구조와 부부 중심이 아닌 자녀 우선의 한국적 가족관계가 온전한 가정을 깨트리고 있다"며 "사회분위기를 성공에서 행복으로 바꿔나가 기러기 아빠가 덜 생기게 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정종호/남윤선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