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가 만드는 피아노는 단순한 제품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의 역사와 문화이며 나의 뿌리죠."

1997년 괴팅겐대 의대를 다니던 크리스티앙 블뤼트너 하슬러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라이프치히에 있는 피아노 공장으로 돌아왔다.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가업을 이어받은 것이다. 곧 동생인 크누트 블뤼트너 하슬러도 합류했다. 이들 형제는 8명의 직원과 나무를 자르고 가공하면서 13년째 수공예 방식으로 하루 한 대의 피아노를 생산하고 있다.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명품 피아노 '블뤼트너(Blutner)'의 157년 전통은 이렇게 5대째 이어지고 있다.

◆'마이스터' 권하는 사회

독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2위를 자랑하는 강소기업,이른바 '히든 챔피언'은 1200개에 달한다. 150년 이상 된 장수기업도 1000여개에 이른다. 이들은 가족기업 형태다. 가족들이 지분을 나눠 갖고 경영을 맡는 방식이다. 가족기업은 독일 기업 전체 매출의 41.5%,고용의 57.3%를 차지한다. 이들은 피아노 업체 '율리우스 블뤼트너 피아노포르테파브릭'처럼 규모는 영세하지만 고유의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공교육을 통한 철저한 기술인력 양성,정부의 가업승계 지원,장인에 대한 사회적 우대는 이처럼 히든챔피언을 낳고 독일 경제의 허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블뤼트너 피아노는 독일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회사는 1853년 라이프치히 대장장이였던 율리우스 블뤼트너가 설립했다. 우연히 피아노 마이스터(장인)의 딸과 결혼하면서 피아노 제조 기술을 배우고 이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블뤼트너 피아노가 세계적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마이스터를 통해 체득한 기술력과 글로벌화 전략이었다. 1850년대 당시부터 블뤼트너는 호주 시드니와 벨기에 브뤼셀,프랑스 파리 등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해 제품 알리기에 본격 나섰다. 시드니까지 피아노를 운반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던 시절이었다.

블뤼트너는 대가 끊길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역사의 순간을 몇 차례 넘기면서 더욱 탄탄해졌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00년대 초반에는 직원이 1000명까지 늘어나면서 유럽 최대 피아노 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1920년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한 차례 부도를 맞았다. 2차대전 중인 1943년에는 연합군의 라이프치히 폭격으로 공장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됐다. 동독 시절인 1972년엔 정부의 사유재산 몰수 방침으로 회사를 정부에 넘겨야 했다.

형인 크리스티앙은 "부친은 기술이 아니라 블뤼트너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고,가치를 파는 기업으로서 의무와 책임감을 강조했다"며 "그동안 면면히 내려온 기술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텨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뤼트너 피아노는 최고 10만유로(약 1억5000만원)에 달하는 고가 제품으로 독일 베흐슈타인과 함께 유럽의 고가 피아노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대량 생산과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디지털 피아노의 공세 속에서도 성장세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수출 비중은 90%에 이른다.


◆제조업 승계는 사회에 대한 책임

바바라 본라트 카스터 독일 중소기업협회 국장은 "독일에는 '(작업용) 토시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데 30년이 걸린다'는 속담이 있다"며 "기술의 영속성이 이어지려면 장기적인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제조업 기술과 노하우가 세대를 넘어가면서도 누수되지 않고 잘 전수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정부의 노력과 사회적 공감대"라고 설명했다.

독일 정부는 글로벌시장에서 경쟁하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가업승계 비용을 줄이는 데 앞장섰다. 2007년 세법을 개정,가업 상속 당시의 고용 수준을 이후 10년간 100% 유지하면 상속세를 모두 면제해줬다. 그런데도 "가업 승계를 독려하기에 부족하다"는 여론이 일자 지난해 말 상속세를 더욱 완화한 경제성장촉진법을 내놨다. 7년간만 고용 수준을 유지해도 상속세를 100% 면제하고,5년간 90%의 고용을 유지하면 85%를 면제해주는 내용이다.

카스터 국장은 "독일의 제조업체는 강하지만 화려하지 않다"며 "이 때문에 중소기업의 가업승계에 대해 '부의 대물림'이란 시각보다는 '기업,나아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짊어지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임승종 중소기업중앙회 가업승계센터장은 "최근 한국에서도 산업 1세대의 은퇴가 본격화하면서 기술 명맥 단절에 대한 우려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며 "하지만 정부 지원이나 사회적 인프라는 이미 수세대의 가업승계 경험을 가진 독일에 상당히 뒤처져 있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베를린 · 라이프치히=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