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가치 상승세가 거침없다. 일본 경제가 여전히 부진한 상황이지만 미국의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금융시장에서 엔화가 그나마 안전자산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10일(현지시간) 경기둔화를 공식 확인하고 만기국채 재매입 등을 통해 실질적인 양적완화조치를 취하자 투자자들은 엔 매수 · 달러 매도에 나섰다. 이 때문에 11일 런던 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는 한때 달러당 84.72엔으로 1995년 이후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경기둔화에 대한 우려가 커져 미국 장기금리가 떨어지면 일본과 미국의 금리 격차가 줄어들고 엔 매수 · 달러 매도가 더욱 가속화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의 경기 불투명성도 크지만 미국보다 금융시스템이 건전하고 경상수지가 흑자를 보이고 있다는 이유로 엔화가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투자자들에게 쉽게 팔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엔화 환율이 달러당 85엔대 밑으로 떨어지면서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노다 요시히코 일본 재무상은 이날도 "엔화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는 발언만 했다.

유럽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달러당 85엔대가 무너지면서 일본 정부의 구두 개입 가능성이 커졌다"면서도 "닛케이평균주가가 9000선을 밑돌지가 최대 관건"이라고 말했다. 증시가 급락하고 일본 경제가 전반으로 타격받고 있다는 신호가 나타나지 않는 한 일본 외환당국이 쉽게 시장에 개입하긴 힘들 것이란 관측이다.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2.7% 하락한 9292.85엔에 마감됐다. 이는 3주 만에 최저치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엔화 가치가 15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지만 일본 외환당국의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한 시장개입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분석했다. 유로화를 비롯해 주요 통화들 역시 달러화 대비 강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만 개입해 엔화 강세를 막으려 해도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의 이해를 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미국 입장에선 엔고 · 달러 약세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미 상무부가 이날 발표한 무역수지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6월 무역적자는 499억달러로 전달 대비 19% 늘어났다. 이는 시장의 전망치 421억달러 적자를 웃도는 것으로 2008년 10월 이후 20개월 만에 최대 규모다.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미국은 약달러가 필요하다.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 개선이 아닌 유로화와 달러화의 약세에 따른 엔화의 상대적 강세는 일본 기업의 수출 채산성을 깎아 먹는다는 점에서 일본 재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고용악화와 소비부진으로 인한 디플레이션(경기침체로 인한 물가하락)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수출마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개입이나 추가금융완화 등의 구체적인 대책이 없을 경우 엔고는 더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외환시장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0일 일본중앙은행(BOJ)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선 엔고로 타격을 입은 수출기업을 위해 대출 조건을 더 푸는 등의 금융완화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일본은행은 엔고 리스크와 관련, "국제금융자본시장의 움직임이 내외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 짚고 넘어갔다.

지금까지는 엔고가 계속돼도 주가가 버텨왔으나 엔고와 주가 하락이 동시에 진행되면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투자와 소비는 냉각되고 BOJ가 "완만하게나마 회복을 지속하고 있다"고 진단한 일본의 경기는 다시 장기디플레의 수렁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