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원 UP '코리아 생산기술'] (4) 기능올림픽 16번 우승한 '손재주'…외국장비 개선 생산성 높여
전북 전주에 있는 알에프세미 공장.이곳에선 음성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꿔주는 '휴대폰용 마이크로폰(ECM)칩'을 만든다. 범용 D램(DDR3 기준)이 가로 11㎜×세로 23㎜×두께 4㎜ 크기인 데 비해 ECM칩은 가로 · 세로 · 두께 모두 1㎜도 안 될 정도로 작다. 크기가 워낙 작아 ECM칩은 회로를 그려넣거나 와이어본딩(금,구리 등으로 회로를 잇는 공정) 등을 처리하기가 까다롭다. 2000년 초반까지 ECM칩용 장비를 만드는 국내회사가 하나도 없었을 정도다.

알에프세미도 2001년 ECM칩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마땅한 장비가 없어 중고 외국 장비를 개조해 사용해야 했다. 이진효 사장은 "ECM칩용 전문장비가 아니다 보니 고장이 잦아 장비를 자주 멈춰 세워야 했고 불량률도 40~50%에 달했다"고 말했다. 외국산 장비는 트리밍(회로 핀을 가다듬는 공정),테스트핸들러(검사공정) 등 연속공정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는 문제점도 드러냈다.

장비를 바꾸지 않으면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 사장은 직접 장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외국산 장비를 해체해 작동원리를 파악한 뒤 현장 엔지니어들이 평소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적용해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기를 2년6개월,알에프세미는 2006년 드디어 자체 장비 개발에 성공했다. 새 장비의 성능은 놀라웠다. 기존 외국산 장비로는 월 200만개의 칩을 만들 수 있던 것에 비해 새 장비로는 월 1000만개의 칩을 양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008년까지 일본 S사,N사,D사가 70%가량을 차지하던 전체 ECM칩 시장에서 작년 50%의 점유율로 1위에 올랐다. 전 세계 휴대폰 2대 중 1대엔 이 회사의 ECM칩이 쓰이는 셈이다.

제조업 경쟁력은 어떤 장비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1차적으로 판가름난다. 좋은 장비를 더 많이 갖춘 기업이 생산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같은 장비를 쓴다고 해서 똑같은 생산성을 내는 것도 아니다. '장비의 효율을 얼마나 극대화하느냐'가 경쟁력 차이를 가른다.

◆'손기술'이 다르다
[파원 UP '코리아 생산기술'] (4) 기능올림픽 16번 우승한 '손재주'…외국장비 개선 생산성 높여

한국 제조업의 현장이 그렇다. 같은 장비를 최고의 효율을 내도록 고치고 외국산 장비를 벤치마킹해 새로운 장비를 만들기도 한다. 알에프세미 공장엔 외국장비를 본떠 만들었지만 성능은 훨씬 좋은 자체 장비들이 넘쳐난다. 반도체 칩을 패키지에 장착하는 핵심 공정인 '다이본딩' 장비도 원래 일본 T사 것을 수입하다가 최근엔 직접 만든 장비로 대체하고 있다. 알에프세미가 자체 제작한 다이본딩 장비는 T사 것보다 생산속도가 3배나 빠른데도 가격은 1억원으로 T사 장비의 절반에 불과하다.

중소기업들뿐만 아니라 대기업 생산현장에서도 이 같은 사례가 많다. 하이닉스반도체는 경쟁사들이 사용하는 미국,독일산 장비를 똑같이 들여와 쓰는데도 생산성은 가장 높다. 수입장비의 움직임을 분석해 생산성을 30~40% 더 높일 수 있게 개조한 덕분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관계자는 "국내에서 쓰이는 반도체 장비의 90%,디스플레이 장비의 70%가 외국 장비일 정도로 한국의 장비제조 기술력은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뒤처진다"며 "하지만 장비의 효율을 높이는 개선 기술은 가장 뛰어나다"고 말했다.

◆아이디어가 넘치는 공장

서영주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은 이에 대해 "국제기능올림픽에서 16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현장 엔지니어와 기술인력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충남 아산에 있는 오성엘에스티.태양전지의 재료인 잉곳과 웨이퍼를 만드는 이 회사는 2008년 대당 10억원짜리 독일 P사의 그로어(grower) 장비를 들여왔다. 이 장비는 태양전지의 원료인 폴리실리콘을 녹여 잉곳을 만드는 것이다. 성능이 좋은 태양전지를 생산하려면 잉곳을 잘 만들어야 하는데 P사 장비로는 질 좋은 잉곳을 만들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영동 상무는 "P사 장비로는 전체 잉곳 덩어리의 30% 정도가 태양전지를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불량률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불량률이 높은 원인은 냉각시스템에 있었다. P사 장비는 원통 안의 용해로를 고정시킨 채 상단,하단,벽면의 히터로 열을 가해 폴리실리콘을 녹인 뒤 아래쪽부터 물을 이용해 서서히 냉각시키는 방식으로 잉곳을 만든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온도를 낮추는 잉곳 하단에 균열이 많이 생겼다. 문제점이 뭔지를 파악한 오성엘에스티 엔지니어들은 즉시 개선작업에 착수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원통 하단의 히터를 없애는 대신 벽면에 상 · 중 · 하 3단계의 히터를 설치한 뒤 용해로를 위 · 아래를 움직이는 식으로 잉곳을 냉각시켰다. 잉곳 바닥부위를 직접 냉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량이 발생할 여지를 없앤 것.불량률을 낮춘 결과 잉곳 덩어리 하나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태양전지 수량이 30% 이상 늘었다. 또 기존 장비로는 잉곳 한 개를 생산하는 데 72시간 걸린 것에 비해 개조한 장비로는 58시간에 잉곳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생산성이 20% 높아진 셈이다. 오성엘에스티는 P사 장비를 개조한 경험을 살려 지금은 독자적인 그로어 장비를 만들고 있다. 이 상무는 "생산성이 좋은데다 가격도 P사 장비의 절반 정도로 저렴해 대만 등 해외업체에서 구입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 · 아산=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