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돈이 없다. 신규 투자 없이 생산성을 높일 방안을 찾아라."

세계 반도체업계가 오랜 불황기를 지나 회복기에 접어든 작년 초.하이닉스반도체 이천공장에서 반도체 식각장비(화학 처리를 통해 회로를 만드는 공정)를 담당하는 제조기술그룹 10팀에 이 같은 특명이 떨어졌다.

당시 주요 경쟁사들은 하반기를 목표로 증산 준비에 나섰다. 하이닉스도 하반기에 연초 대비 생산량을 50% 더 늘린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장비를 구입할 돈이 없었다. 2008년 1조92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본 탓이다. 10팀도 생산목표를 달성하려면 대당 45억원짜리 미국 LAM사 장비 2대를 더 들여와야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기존 장비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지만 LAM사에서도 "더 이상의 효율을 내기 힘들다"고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궁즉통(窮卽通)이었을까. 10팀 직원들은 LAM사 장비의 작동 패턴을 정밀 분석한 끝에 8단계로 움직이는 로봇팔의 동선을 6단계로 줄여 웨이퍼 처리속도를 11초나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현장에 적용한 결과는 놀라웠다. 장비 한 대에서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웨이퍼 숫자가 112장에서 130장으로 늘어난 것.똑같은 LAM사 장비를 쓰는 경쟁사들의 평균 생산성(시간당 90장)보다 44%나 높은 수준이다. 덕분에 작년 2분기까지 7분기 연속 적자를 냈던 하이닉스는 작년 3분기부터 실적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는 전 세계 산업계에 크고 작은 지각변동을 불러일으켰다. 경쟁력이 뒤처지는 기업들이 쇠락하면서 '승자 독식' 현상을 가속화한 것.다행히 상당수 한국 기업들은 승자의 지위를 누렸다.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하이닉스 등은 물론이고 현대자동차,포스코 등이 최대 실적을 올리며 글로벌 시장을 주도했다.

중소 · 중견기업들도 마찬가지.휴대폰용 마이크로폰칩 제조업체 알에프세미는 2008년 초까지 경쟁 관계였던 일본 N사,S사를 제치고 작년부터 세계 1등으로 올라섰다. 한국 제조업체들이 승자로 올라선 비결은 뭘까.

경쟁 기업의 몰락,고환율 효과 덕분이기도 하지만 핵심 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기술에 있다는 분석이 많다. 권혁천 생산기술연구원 기술지원본부장은 "과거 선진국의 단순 하청기지에 불과했던 국내 기업들이 20~30년간 축적한 기술력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통해 최적화된 생산기술을 갖춘 결과"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접한 한국 제조업체들의 생산성은 놀라웠다. 신도리코는 미국,일본 기업에서 창안한 컨베이어벨트,셀(cell) 생산 방식의 장점을 현장에 최적화한 '대차생산'이란 독특한 생산기법으로 해외 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삼성SDI는 경쟁 업체보다 빨리 만드는 '스피드'를 무기 삼아 일본 경쟁사를 꺾고 2차전지 시장 1위 도약을 앞두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수백개의 부품을 조립,부품 덩어리로 만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모듈 공정으로 현대 · 기아자동차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이태명/송형석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