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만이 29일 5차 양안(兩岸 · 중국과 대만) 회담을 갖고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한 곳은 충칭이다. 인구 3000만명이 넘는 중국 최대 도시 충칭은 중국 공산당과 대만 집권 국민당 모두에 각별한 의미를 주는 곳이다. 1937년 일본군에 밀려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긴 국민당 정부는 그해 공산당과 항일(抗日)이라는 이름 아래 2차 국공합작을 시작했다. 이번 ECFA 타결을 두고 '3차 국공합작'이라는 의미가 부여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1차 국공합작은 1924년 제국주의와 군벌 타도를 내세우며 시작됐다. 하지만 공산당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장제스가 1927년 상하이에서 반공 우파 쿠데타를 감행,국공합작은 결렬됐다. 10년간의 국공 내전을 종식시키고 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것은 일본의 중국 침략이었다.

1949년 신중국 건국으로 국민당은 대만으로 물러났고 양안을 두고 국공은 다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후 양안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굴곡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 중국 샤먼이다. 남북한의 군사분계선처럼 지금도 샤먼과 대만의 진먼다오에는 미사일과 해안포가 설치돼 있다. 그러나 지금 샤먼은 양안경제특구의 금융 허브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대만은 1981년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특별자치구가 돼 달라는 중국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1987년에는 본토 출신자 200만명의 비공식 중국 방문을 용인하기도 했다. 양안 간 해빙 조짐이 보이던 때였다. 2000년 대만 독립을 주장해온 민진당이 집권하면서 양안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2008년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이 취임하면서 양안에는 3차 국공합작을 예고하는 조짐들이 이어졌다. 그해 59년 만에 대만과 중국 간 항공기 직항로가 개설된 게 대표적이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