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취임한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의 첫 행보는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의 만남'이다. 한은 간부들로부터 업무 보고조차 다 받지 못한 김 총재가 오는 5일 서둘러 윤 장관을 만나기로 한 것은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중시했던 과거 행태에서 벗어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김 총재는 한은이 '물가안정'에만 주력했던 것이 큰 문제였다고 보고 있다. 고용과 성장을 함께 중시하는 시각에서 한은의 통화신용정책 성과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고용과 성장을 중시하는 '미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모델'로 한은을 새롭게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FRB모델로 봤을 때 한은이 '물가안정' 측면에선 합격점을 받을 수 있지만 고용과 성장(특히 성장잠재력 확충)엔 다소 미흡했으며,'금융안정'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물가안정엔 기여

한은은 1997년 말 개정된 한은법에 따라 정책목표가 '물가안정'으로 국한됐다. 한은은 새로 부여받은 한 가지 목표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1999년 5월 '콜금리 목표제'를 도입했다. 하루짜리 콜금리 조절을 통해 시중의 금리를 변경시키고 이를 통해 물가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콜금리 목표제'는 2008년 3월 '한국은행 기준금리' 제도로 개편됐다. 이는 한은이 은행들과 거래하는 일주일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의 금리를 조정함으로써 시중금리 및 더 나아가 물가를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콜금리 목표제'와 비슷하지만 좀 더 개선된 통화정책 수단이다.

한은은 1999년부터 지금까지 정책금리(콜금리 및 기준금리)를 모두 27번 올리거나 내렸다. 이를 통해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99년 이후 4%를 넘은 것이 두 번에 불과했다. 대체로 2.5~3.5% 수준에서 머물렀다.

2004년 1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지속적으로 정책금리를 인상한 것은 적절한 조치였다는 평가다. 부동산 열기가 과열로 치달을 당시 정책금리 인상을 통해 버블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다만 일각에선 2000년 이후 중국산 저가품 덕분에 전 세계 주요국에서 인플레가 발생한 나라가 없다는 점에서 한은이 대단한 기능을 한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고용증대 · 성장엔 미흡

한은은 지난해까지 실업률 측면에서도 후한 점수를 받았다. 2000년 4.4%,2001년 4.0%를 기록한 실업률은 2002년부터 3%대로 하락한 이후 한 번도 4%대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실업이 아닌 '고용 증대'를 놓고 보면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취업자 비율을 가리키는 고용률의 경우 2002년엔 60%를 기록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최근 들어 성적이 더 나빠지고 있다. 고용률은 지난해 11월까지는 59%대를 유지했지만 올해 들어선 두 달 연속 56%대로 주저앉았다.

고용에 대한 한은 집행부의 인식은 김 총재와 전혀 다르다. 김 총재가 "경제의 두 축은 고용과 물가"라고 했지만 이성태 전 총재는 "구조적인 요인에 따른 고용 문제에 대해 한은이 할 역할은 없다"고 말했다. 현재 한은의 전반적 기류도 이 전 총재의 생각과 같다.

성장률은 악화일로다. 외환위기 직후 10% 안팎이던 성장률은 지난해 0.2%로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성장잠재력의 훼손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5% 수준으로 평가되던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3%대로 하락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금융안정엔 역할 못해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터진 이후 한국은 극심한 외화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외국투자자들과 외국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주거나 투자한 돈을 회수하는 통에 '달러 기근'을 면치 못했다.

이 때문에 원 · 달러 환율이 1500원대까지 치솟는 등 제2의 외환위기 직전까지 몰렸다. 리먼 사태 이후 한은이 외환보유액을 시중은행에 풀고 미국 FRB와의 통화스와프 등을 통해 제2의 외환위기로 치닫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이 같은 외화유동성 위기를 사전에 예방하지 못했다는 차원에서 한은은 질타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한은도 할 말이 있다. 한 관계자는 "금융회사의 외화유동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예방을 할 것 아니냐"고 항변했다. 또 "금융안정이 우리의 목표가 아닌데 왜 우리에게 책임을 묻느냐"고 한다.

때문에 김 총재가 밝힌 대로 '금융안정' 기능을 하려면 한은에 충분한 수단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한은의 목표를 넓히고 이에 걸맞은 수단을 부여함으로써 국가경제 전체의 발전과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