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하이닉스반도체 영업마케팅본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삼성전자 내 PC 제조를 담당하고 있는 IT솔루션사업부.요지는 PC에 들어가는 D램을 구매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세계 최대 D램 메이커인 삼성전자가 이례적으로 경쟁사인 하이닉스에 반도체를 주문한 것이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1983년 창사 이래 삼성전자로부터 주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전했다. 가뜩이나 고객들의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던 하이닉스 측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삼성의 요청을 거절했다.

한국 반도체업계를 같이 짊어지고 간다는 동류의식에 선발주자인 삼성전자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기존 고객들의 다급한 사정을 감안하면 들어주기 힘든 사안이었다.


◆다급한 PC…느긋한 반도체

삼성전자 세트부문이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상황은 최근 반도체 경기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29일 취임 기자회견을 가진 권오철 하이닉스 사장은 "100개를 주문받으면 60개밖에 내주지 못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2007년 4분기 이후 극심한 침체국면에 빠져 있던 반도체 시황은 지난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본격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올 들어 만개하고 있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움츠러들었던 기업들의 투자가 살아나기 시작한 데다 침체 뒤에 찾아오는 '스프링 효과'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해 10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7 출시,연초 인텔의 신형 중앙연산처리장치(CPU) 출시가 주요 기업들의 PC 교체 주기와 맞물리면서 반도체시장엔 가수요 현상까지 생겨나고 있다. 폴 오텔리니 인텔 최고경영자(CEO)도 "그동안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한동안 설비 투자를 하지 않아 PC 등 IT인프라가 상당히 노화돼 있다"며 "올해 기업들이 상당한 규모로 PC를 사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레노버 휴렛팩커드(HP) 델 등 세계 주요 PC 메이커들의 반도체 재고물량은 지난 1월만 해도 4주분에 달했으나 이달엔 3주분으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PC가 팔려나가는 속도에 비해 재고 확보가 느리다는 얘기다. 때문에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를 찾아오는 고객사들의 '레벨'도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부장급이나 초급 임원들이 방문했지만 요즘엔 고위 임원이나 구매부문 최고경영자(CPO)까지 직접 나서고 있다는 후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자신들의 생산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물량을 달라고 하지만 워낙 주문이 몰려들어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방문 횟수도 종전 보름에 한 번꼴에서 일주일에 2회 정도로 훨씬 잦아졌다.


◆전망치 웃도는 판매실적

그렇다면 최근 반도체 경기 호황은 일시적인 것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적어도 연말까지는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2001년 밀레니엄 특수 이후 이렇다할 모멘텀이 없었던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PC교체 수요가 일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시장조사업체인 가트너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경기회복세로 개인과 기업들의 PC 교체 수요 증가,아시아와 남미 등 신흥시장의 성장 등으로 세계 PC 시장규모는 지난해보다 17%가량 늘어난 3억6600만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아이서플라이와 IDC 등 주요 시장조사업체도 올해 PC 시장이 약 12~14%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 PC기업들의 1분기 실적은 이 같은 전망을 훨씬 웃돌고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1분기 노트북 판매량은 지난해 4분기에 비해 무려 40% 정도 늘어날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판매증가율이 부진한 데스크톱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20% 이상의 신장세를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PC시장의 약진은 계절적인 교체 수요 외에 PC 성능 자체의 업그레이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TV 디지털카메라 등과의 호환성이 좋아지고 3D 사양 등 첨단 기능들을 흡수하면서 PC의 효능이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고 있는 반면 가격은 하향안정세를 띠고 있다는 것.

업계 관계자는 "휴대폰 전자책 등 디지털 기기들이 아무리 위세를 떨친다 하더라도 세계 반도체경기를 움켜쥐고 있는 업종은 PC"라며 "10년 만에 찾아온 PC 호황이 세계 IT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부 차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