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는 언제부터인지 항해정신을 잃었습니다. 고유의 DNA를 상실한 채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게 실패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제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지난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모터쇼에서 사브의 빅토르 뮬러 회장이 한 얘기입니다. 자아 비판 같지만 뮬러 회장은 사브를 인수한 네덜란드 스포츠카업체인 스파이커의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하지요. 사브의 새 주인으로서,피인수 기업의 과오를 조목조목 짚었던 겁니다.

사브의 발표회장 분위기는 시종일관 밝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보다 훨씬 적은 취재기자들이 찾았던 점이 사브의 추락한 위상을 말해주는 듯했지요.

뮬러 회장은 사브에 대해 냉정한 평가도 내렸습니다. "사브는 항상 혁신적인 회사였고 기술의 첨단을 달려왔다. 하지만 독립정신을 잃어버린 후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변화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사브의 회생 여부는 전적으로 사브 자신에 달렸다고도 했지요. "사브는 분명 살릴 가치가 있는 기업이다. 스파이커가 4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이유다. 하지만 허니문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업가정신과 프리미엄 시장에 대한 약간의 노하우만 전달할 계획이다. 사브의 경영은 사브가 맡고,책임도 사브가 진다. "

그동안 사브의 부침을 목도해 온 얀 아케 욘슨 CEO는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지막 기회'란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00일 내 GM과 완전히 분리하고 독립 회사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며 "터보차징 및 안전기술,공기역학 디자인 등 고유 유산을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브의 가장 큰 결점은 폭넓지 않은 라인업입니다. 이에 대해 욘슨 CEO는 "올 여름 새롭게 디자인한 9-5 세단을 내놓고,내년에 9-4X 크로스오버,2012년 신형 9-3를 줄줄이 출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중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베이징자동차와 제휴를 맺었다고도 했지요.

스파이커의 사브 인수가 '새우가 고래를 삼킨' 사례란 점을 의식한 듯 뮬러 회장은 이에 대한 발언도 했습니다. "2년 전 직원 100여 명의 스파이커가 사브를 인수할 거라고 말했다면 다들 웃었을 테지만,자동차 업계에 불어닥친 퍼펙트 스톰(완벽한 폭풍) 때문에 현실이 됐다"고 하더군요.

사실 스파이커의 사브 인수는 비행기를 만들던 업체 간 결합이란 점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스파이커는 1914년 DAF란 네덜란드 항공회사와 합병했고,그 이후 항공기 프로펠러 모양의 로고를 써오고 있습니다. 공기역학 기술을 특히 중시하는 이유이지요.

사브 역시 1937년 항공기 엔진 제작소로 출발한 기업입니다. 항공기 운전석을 연상케 하는 시트나 나이트 패널(야간 운전 때 속도계를 제외한 나머지 계기판의 불을 꺼주는 장치) 등이 이런 유산의 영향입니다.

역시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사브가 미국 색채를 버리고 유럽 본래의 색깔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일 겁니다. 종전의 최대주주였던 'GM'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유럽업체를 모기업으로 두게 됐기 때문이죠.욘슨 CEO가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우리는 스웨덴 회사이며,이를 잊어선 안 된다"란 점을 수 차례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브는 전통을 되살리겠다는 생각인 듯 수십 년 된 클래식카를 전시했더군요.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온 사브.굴종의 역사를 보면서 도요타의 리콜사태가 오버랩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잘나갈수록 만사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건 모든 실패에서 배우는 교훈인 것 같습니다.

산업부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