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부터 2년간 니혼게이자이신문 한국특파원을 지낸 야마자키 가쓰히코 씨(75)가 기억하는 호암은 인자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1987년 호암이 별세할 때까지 거의 한달에 한번꼴로 만났다는 야마자키 씨는 스스로 "호암을 가장 잘 아는 일본인"이라고 자부한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전'이란 책을 내달중 출판할 계획이기도 하다. 호암이 도쿄 출장길에 자주 묶었던 오쿠라호텔에서 야마자키 씨를 만났다.

호암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70년 3월 니혼게이자이신문 특파원으로 서울에 부임한 뒤 인터뷰를 위해 처음 만났다. 중앙일보 옛사옥 4층 집무실로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방 앞에 한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영수업을 받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당시 중앙일보 이사)이었다. 30분 정도의 인터뷰가 끝나자 호암은 "앞으로 종종 놀러오라"고 말했다. 그 뒤로 호암은 도쿄에 들를 일이 있으면 꼭 나를 찾았다. 적어도 100회 이상 만난 것 같다. "

호암은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나.

"수많은 곤란을 이겨내며 천하의 큰 일을 이룬 사람이다. 그는 '천신만고'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그의 인생이 그 말 그대로 였다. 그런 난관 속에서도 어짐(仁)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

호암은 깔끔하고 철두철미한 인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과 관련해서는 그랬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소탈한 사람이었다. 도쿄에 오면 넥타이를 풀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지인을 만났다. 식사를 할 땐 고급 음식점 대신 평범한 식당에 자주 갔다. 오쿠라호텔 인근의 '에비스'라는 비싸지 않은 초밥집을 잘 갔는데,이곳 주방장은 나중에 신라호텔 일식집의 선생 역할도 했다. "

'경영자 이병철'은 어떻게 평가하나.

"인재를 중시한게 가장 인상에 남는다. 그는 직원들을 철저하게 연수 교육시켰다. 투자도 많이 했다. 언젠가 '뭣하러 직원 연수에 그렇게 돈을 쓰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지금 21세기 삼성을 이끌 인재를 키우고 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냐'고 말하더라.그는 40년 전부터 21세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은 언제였나.

"마지막 만남이다. 1987년 11월 별세하기 두달반 전인 8월말 오쿠라호텔 객실에서 만났다. 이미 폐암이 악화돼 건강이 매우 안좋을 때였다. 대화 중에 가운 사이로 가슴이 살짝 보였는데 몹시 말라 있었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을에 다시 오겠다'는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는데,9월초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하고 돌아가셨다. 이 회장은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평소에 '사람은 병으로 쇠약해져 죽는 게 아니라,매일 도(道)를 닦다가 다 닦으면 세상을 떠나는 것'이란 말씀을 하곤 했다. "

호암이 일본에 자주 온 이유는 무엇인가.

"경영이념중 하나인 '합리추구'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반일(反日)감정이 커 일본에 자주 오면 '친일파' 소리를 들을 때였다. 그러나 이 회장은 '일본이 아무리 싫어도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일본을 태평양 멀리 던져버릴 순 없지 않느냐'고 말하곤 했다. 그렇다면 배울 건 배우고,거래할 건 거래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호암이 1980년대 초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한 곳도 일본인데,당시 기억나는 일화는.

"샤프의 반도체 기술자를 불러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안다. 그때 호암은 생각보다 많은 고민을 했다. 반도체를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삼성 전체가 망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가 도약하려면 '산업의 쌀'인 반도체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당시 그는 후계자로 내정한 3남 이건희 전 회장에게 회사를 승계하는 문제도 남아 있었다. 한번은 '앞으로 10년만 더 살아서 반도체 사업의 기초를 다지고,2세 승계를 마무리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10년이란 시간을 다 허락하진 않았다. "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