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우리나라에서 처음 합성수지로 빗과 비누갑을 만든 이는 LG 창업주 구인회(1907~1969년)였다. 시기는 1952년 10월.당초 화장품 판매업을 하던 구인회는 플라스틱 공업에 대한 이해를 넓히면서 원료와 시설만 있으면 온갖 생활필수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빗을 받아들고 "이 빗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국산이다 이 말이지?"라며 대견해 했다고 한다. 한국의 일상용품과 주방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꾼 플라스틱 혁명의 시작이었다.

장면 2.1961년 6월27일,5 · 16 혁명 지도자 박정희 소장(1917~1979년)과 이병철 삼성 창업주(1910~1987년)가 단독 회동을 가졌다. 혁명 정부가 빈약한 재정 확충과 민심 수습을 위해 많은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붙이던 시절이었다. 이병철은 "경제인을 죄인시하지 말고 새로운 경제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박정희는 이 얘기를 즉각 수용해 이듬해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력으로 활용했다.

장면 3.1968년 12월30일 현대건설의 도색기술자 김경호씨는 새벽녘에 귀가해 작업복을 벗어 던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한숨도 못잔 채 40시간이 넘도록 차선의 도색작업을 하고 난 뒤였다. 발단은 1968년 12월21일 열린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간 개통식장에서 건설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연내 오산까지 개통을 마무리하겠다"는 보고를 하면서였다.

장관의 착각이 빚은 이 보고를 실현하기 위해 건설현장에서는 온갖 소동이 벌어졌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1915~2001년)는 현장에서 근로자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작업을 지휘했다. 공사는 12월30일 오전 9시 수원~오산 간 개통식을 시작하기 불과 3시간 전에 마무리됐다.

장면 4.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는 26억달러,고용창출 효과는 33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알린 첫 국제행사였으며 한국이라면 '전쟁'부터 떠올리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성공을 과시한 무대였다.

장면 5.영국의 BBC 방송은 2006년 5월 한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을 3부작으로 방영했다. 런던에 살고 있던 찰스 브라운은 이 프로그램을 본 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한국이 저 정도로 발전한 나라였어?"라고 하자 옆에 있던 여동생 루이자가 말했다. "오빠 휴대폰이 삼성 애니콜이잖아.삼성은 한국 기업이야." 찰스는 이 얘기에 깜짝 놀라 "삼성이 한국 기업이야? 일본 기업인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루이자는 세상의 흐름에 둔감한 오빠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내 휴대폰은 LG거야.LG도 한국 기업이야.뉴스 좀 보고 살아,오빠."

1910년 한일병합은 근대화 노력을 게을리한 데 따른 징벌이요,파국적 결말이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자처한 조선은 무위와 무능으로 일관하며 세계 변화의 흐름을 거부하는 만용을 부렸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구한말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년)은 1894년 조선의 모습을 이렇게 힐난했다.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도무지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

비숍 여사의 한숨을 자아냈던 한국의 모습은 해방된 지 15년이 지난 1960년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당시 한국은 유엔(UN) 가입 120개국 중에서 인도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76달러.당시 태국은 220달러,필리핀은 170달러였다.

◆스스로 쟁취한 근대화

그랬던 나라가 이제 세계 9위의 수출대국으로 성장해 유사 이래 최고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기적이다. 1945년 독립한 신생국 가운데 유일하게 원조 공여국의 지위와 위상을 확보했고,가장 역동적인 시장경제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달성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위대한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근대화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나라를 대신해 스스로 근대적 역량을 개척하고,시련과 역경 앞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주도적으로 결정해 나간 사람들 덕분이라는 뜻이다. 유 교수는 이들을 '새로운 국민'으로 명명했다. 새로운 국민의 선봉은 기업가였다. 그들은 일제시대에 쌀가게와 정미소,포목상과 방직업으로 근대 기업의 맹아를 일궜다. 광복 후 좌-우익의 극한 대립,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상업과 무역 기반을 착실하게 다져 나갔다.

◆기업가의 진정성

그 선봉장은 한일병합이 이뤄진 해에 태어난 이병철이다. 그는 한국의 수많은 상점들이 기업으로,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경제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병철은 1953년 8월 창업한 제일제당으로 당대 최고의 기업과 부를 일궜다.

회사 설립을 준비할 당시 참모들은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장을 짓는 것은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단순 중개무역만으로는 제대로 된 기업을 일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제일제당은 예상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아침에 설탕 한 트럭을 싣고 나가면 오후에 한 트럭의 돈이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회장의 마음 속에는 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희열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저서 '호암자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들이 활기차게 일에 몰두한다. 기업가에게는 이러한 창조와 혁신감으로 생동하는 과정을 바라볼 때야말로,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일 것이다. "

난세를 헤치며 우리나라 산업의 물줄기를 만들어 놓은 기업가 정신을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구들이다. 한국의 기업가들은 이윤 추구에만 골몰하는 여느 나라의 자본가들과 달리 국사(國士)적 성향이 강했다.

구인회,이병철,박두병(1910~1973년 · 두산의 2대 경영자),정주영,이회림(1917~2007년 · OCI 창업주) 등 오늘날 글로벌 무대를 질주하고 있는 기업들의 토대를 닦은 기업인들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사이에 태어났다.

나라 잃은 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극에 달했던 시절,부국강병(富國强兵) 없이는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안전,그리고 행복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세대였다.

◆"조국 부강을 위하여"

굳이 "나라가 있어야 기업도 있다"는 이병철의 창업 이념인 사업보국(事業報國)을 들지 않더라도 수많은 기업인들의 육성을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나중에 현대자동차그룹에 흡수되긴 했지만 기아 창업주 김철호(1905~1973년)는 국내 기계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해냈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던 해에 태어난 그는 일제가 가족들의 땅을 빼앗아가자 일본에서 막노동과 철공소 직공을 하며 청춘을 보냈다. 1944년 귀국해 자전거와 볼트 너트 등의 가공품을 생산하는 경성정공을 설립한 김철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16일 직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어엿한 독립국가가 되었으니 경성정공에서 만드는 제품에는 반드시 대한민국 제품이란 상표를 붙이고 품질 향상에 주력하라.우리의 사명은 기계공업 진흥을 통해 조국 부강과 민족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 그는 1949년 자전거 안장 3000개를 첫 수출하기 위해 당시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던 일본 밀항까지 마다하지 않은 기업인이다.

◆성공신화는계속된다

"사업은 기회요,선점"이란 말로 경제계를 종횡무진한 기업인은 구인회다. 그가 1959년 창립한 전자회사 금성사는 출범 초기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회사 내 많은 간부들이 폐업을 건의하고 나섰다. 하지만 구인회는 "몇 년 해서 안 된다고 문을 내릴 순 없다. 구름 뒤의 해를 생각해야 하는기라"고 말했다. 금성사의 기사회생은 절묘하게 찾아왔다. 1961년 박정희 정부가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해 가사 상태에 있던 금성사를 순식간에 끌어올렸던 것.

물론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이 같은 영웅전으로 압축할 수는 없다. 특출난 몇몇 개인의 힘으로 이룩한 기적도 아니다. 정진석 국민대 교수는 "농지개혁과 새마을운동 등으로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점,후손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의지,산업화를 향한 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 등이 입체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성공은 곧 한국인의 성공을 의미한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 국민 개개인이 성공의 기회와 경험을 향유한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의 위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지구촌 구석구석에 울려퍼지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00년 전 세계 최빈국을 오늘날 주요 20개국(G20)의 당당한 일원으로 끌어올린 도전 의지와 역동성이 종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져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이 미래의 또 다른 질풍노도를 헤쳐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