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에 올해는 작년 말부터 이어진 금융위기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고 수습하는 한 해였다. 하지만 새해에는 상황이 다르다. 소극적 불황 경영을 마감하고 다시 생존과 변화,질적인 성장을 위한 적극적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환율 효과에 힘입은 국내 대기업들이 거대 기업 간 합종연횡 등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경쟁환경 속에서 새로운 도전에 마주하는 것도 분명하다. 4대 관전 포인트를 통해 내년 주요 대기업들의 경영 화두(話頭)를 짚어봤다.

(1) 이종 산업간 결합 가속

국내외 기업들의 내년 공통 경영 화두 중 하나는 융 · 복합이다. 유 · 무선 통합에 이어 통신과 금융,자동차와 신소재 등 이종(異種) 산업 간 새로운 결합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 최대 통신회사를 이끌고 있는 이석채 KT 회장은 '데이터 폭발(Data Explosion)'을 내년 통신시장의 최대 경영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손안의 PC'로 불리는 애플 아이폰 등 스마트폰 열풍이 유 · 무선 통합을 넘어서는 데이터 시장의 확대,새로운 사업 기회 창출,기업 근무환경 혁신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곧 소프트 경쟁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싸움을 좌우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세계적 트렌드는 이종 결합"이라며 "통신과 금융상품의 결합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열 재정비를 마친 KT와 SK,LG 등 통신 빅3 간 유 · 무선 통합 서비스 경쟁은 연초부터 시장을 달굴 것으로 보인다. 초고속 인터넷과 유 · 무선전화,IP(인터넷)TV가 결합한 신(新)서비스 개발 및 가격 경쟁이 승자와 패자를 가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기업들의 조직 운영에서도 컨버전스 개념이 확산될 전망이다. 현대 · 기아자동차그룹과 LG그룹은 올해 부품 관련 계열사의 통합을 끝냈다.

전문가들은 내년부터 하드웨어끼리의 통합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서비스까지 하나로 묶는 형태의 컨버전스가 산업계 곳곳에서 벌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포스코 등 철강업체들이 티타늄,리튬 등 첨단 소재 사업을 확대하면서 전자 및 석유화학업계 등과의 사업영역 경계도 조금씩 무너질 것으로 보인다. 조선업계도 대형 선박 건조 과정에서 IT(정보기술) 부문과의 융 · 복합 바람이 거세질 전망이다.

(2) 3세 경영인들의 광폭 행보

삼성 현대 · 기아차 LG SK 등 4대 그룹이 이번 주부터 다음 주 사이에 새해 공격 경영을 위한 경영진 재편을 마무리한다.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오너 3세들의 승진 및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계에서는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은 오너 경영인들이 신사업 발굴과 공격 경영을 전면에서 이끌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공격 경영 시기에는 신속한 의사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해서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할지 여부가 특히 관심거리다. 삼성의 발목을 잡고 있던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사건 등 사회적 논란이 올해를 고비로 대부분 마무리됐기 때문에 이 전무의 행보에 다시 힘이 실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대 · 기아차는 지난 8월 정의선 기아차 사장을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 발령,'글로벌 빅5 도약'을 진두지휘하도록 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모비스의 지주회사 전환을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정 부회장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구본무 회장의 장남인 구광모 LG전자 과장은 스탠퍼드대 MBA 과정을 마치고 최근 LG전자로 복직,주요 부서를 돌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조양호 한진 회장의 맏딸 조현아 상무와 장남 조원태 상무의 승진 여부도 관심거리다. 일본 유학 중인 김준기 동부 회장의 아들 남호씨와 올해 말 군복무를 마치는 김승연 한화 회장의 장남 동관씨의 경영 일선 참여 여부 역시 주목된다. 신세계는 정용진 총괄 대표체제로 전환,오너 책임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3) M&A 전쟁 재점화

내년은 인수 · 합병(M&A)의 해가 될 전망이다. 대우조선해양 대우인터내셔널 하이닉스반도체 현대건설 대우일렉트로닉스 쌍용건설 등 대형 알짜 매물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국내 M&A 시장을 주도할 다크호스는 단연 포스코다. 이 회사는 대우인터내셔널에 이어 시차를 두고 대우조선마저 인수하는 전략을 검토 중이다.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 2위 기업인 하이닉스는 1차 매각이 불발됐지만,내년에는 어떤 형태로든 새 주인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금융권에서도 M&A를 통한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외환은행과 우리금융지주 지분 매각이 진행되면 국내 금융권 전반의 이합집산이 이뤄질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인천공항공사 한국공항공사 대한주택보증 등 대형 공기업 매각도 관심거리다. 재계에서는 대형 M&A 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은 상황이기 때문에 매각 시기를 조절하고 맞춤형 매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형 M&A 대상 기업들의 향배는 재계 판도 변화와 직결될 것으로 보이지만,문제는 이들을 인수할 만한 후보 기업들의 자금 여력과 의지다. 쏟아지는 매물들이 외국 기업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4) 재무구조 개선의 벽 넘을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산보다 빚이 많아 재무건전성에 문제가 드러난 대기업들이 적지 않다.

기업 채권단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고 있는 대기업들이 계열사 매각과 자본조달 등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다시 성장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최근 대우건설 재매각 작업에 진통을 겪고 있다. 금호는 재무적 투자자들과 풋백옵션 행사를 미루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동부그룹은 동부하이텍의 재무구조 개선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동부메탈을 상장하고 농업 부문(옛 한농화학 등) 및 유휴 부동산을 팔아 반도체 부문의 독자 생존 기반을 닦는다는 구상이다.

GM대우자동차는 내년 7월께 준대형 세단 VS300을 출시하는 한편 국내외 판매 네트워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로 했다. 총 7조7000억원(작년 말 기준) 선인 총 부채 규모를 줄이기 위해서는 신차 판매가 우선돼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중 · 장기적인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주거래은행인 산업은행과도 자금 지원 협상을 계속하기로 했다.

지난 11일 열린 채권단 관계인집회에서 회생 방안이 부결된 쌍용자동차의 진로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17일 법원이 회생계획안에 대해 강제인가 결정을 내리면 새해에는 독자 회생 또는 제3자 매각 중 한 쪽으로 운명이 정해질 전망이다.

장창민/송형석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