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흑백TV를 처음 생산한 해는 1970년이었다. 기술은 일본 산요와 NEC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같은 해 현대건설은 조선업 진출을 위한 사업신청서를 제출했다. 기반 기술은 역시 일본 가와사키 것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0년,한국과 일본이 숙명적인 산업대전(大戰)을 예고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세계 제조업계에 구축해 놓은 30년 아성에 한때는 동북아의 변방이었으되,이제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세계 7대 제조업 포트폴리오(반도체 전자 자동차 철강 기계 조선 화학)를 갖춘 한국이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다.


◆신산업 태동이 안겨준 기회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분야는 TV나 자동차 같은 완제품이 아니라 부품과 소재다. B2B(기업 간 상거래) 시장의 특성에 가려 일본 기업들의 진면목이 세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일본이 부품 · 소재 분야에서 갖고 있는 경쟁력은 누구의 추종도 허락하지 않아왔다.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일본 원천기술이 갖고 있던 비교우위는 빛이 바랬다.

반면 새로운 기술과 제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신산업 분야는 아직 어느 쪽에도 비교우위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인재와 자금,선견력만 있다면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2차전지 등과 같은 핵심 전자부품 시장이다.

◆D램 능가하는 2차전지 시장

'1위 산요(24.5%),2위 소니(20.9%),3위 파나소닉(19.1%),4위 SGS(8.8%),5위 맥셀(3.3%)'.2000년 세계 2차전지 시장 점유율이다. 1~5위까지 모두 일본업체들 차지였다. 군소업체들까지 포함해 당시 일본 기업 점유율은 80%를 웃돌았다. 한국에서는 LG화학이 1.3%,삼성SDI는 0.4%였다. 겨우 명함만 내민 수준이었다.

하지만 2008년 삼성SDI는 점유율 15%로 소니를 제치고 2위로 뛰어올랐고,LG화학은 6.8%로 5위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 점유율이 30%포인트가량 하락한 반면 지난 8년간 한국기업들의 점유율은 24%로 뛰어 올랐다. 올해는 TV,휴대폰 등 국내 전자업체들의 약진으로 2차전지 업체들의 점유율이 더욱 높아졌다.

국내 2차전지 업체 관계자들은 지금까지의 성장은 서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2차전지 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 자동차용 전지 시장이 열리고 있어서다. 자동차용 전지 수요로 2차전지 시장은 2015년께 26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250억달러 선에서 정체할 것으로 예상되는 D램시장을 웃도는 수준이다.

김형기 전기연구원 2차전지 센터장은 "소형 전지는 일본업체에 비해 늦게 시작했지만 자동차에 들어가는 대형 전지는 출발도 비슷하고 제조기술 수준도 차이가 없다"며 "국내업체들에는 더욱 큰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내년 세계 1위 2차전지 업체 등극을 노리고 있는 삼성SDI는 사업다각화를 통한 성장전략을 펴고 있다. 삼성SDI 관계자는 "소형 2차전지 시장뿐 아니라 자동차용 2차전지와 스마트그리드 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해 시장의 주도권을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삼성SDI는 세계적 부품업체인 보쉬와 함께 BMW에 납품을 성사시켰고 북미 대형 부품업체인 델파이와도 상용차용 전지 납품 계약체결에 성공했다.

LG화학은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공격적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 투자가 끝나 공장 가동이 본궤도에 오르는 2013년에는 20만대 안팎의 전기자동차에 공급할 수 있는 5000만개(셀) 규모의 배터리 생산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미 GM과 현대 · 기아차의 미래형 자동차 공급권을 따낸 LG화학은 다른 자동차 메이커들과도 추가 공급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후발 주자인 SK에너지는 박막코팅,배터리 팩 · 모듈 제조기술까지 리튬이온 전지 관련 핵심기술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앞세워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화력'재점화한 일본

한국 기업들의 도전에 맞서는 일본 업체들의 응전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중단하다시피했던 투자를 재개하고 공장 증설 및 인수 · 합병을 통해 신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어 한 · 일 양국간 2차전지 전쟁은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 6위까지 추락한 파나소닉은 최근 1위 업체인 산요를 인수하기로 했다. 압도적인 시장점유율로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포석이다. 또 1조5000억원을 들여 오사카에 리튬이온전지 공장을 건설,증가하는 수요에 대응키로 했다. 산요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그동안 특정 회사에만 공급하던 하이브리드카 전지를 국내외 모든 자동차회사에 공급하기로 결정하고 전방위 공세에 나서고 있어 곳곳에서 국내 업체와의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세계 시장 3위인 소니도 4000억원을 투자해 리튬이온 전지 생산능력 확대,점유율 회복을 벼르고 있다.

◆1위 도전하는 MLCC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는 삼성전기가 1990년대 초부터 개발에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시장을 독과점하다시피 한 일본업체들은 삼성전기가 따라올만 하면 가격을 내리면서 점유율 확대를 가로막았다.

삼성전기는 경쟁기업보다 6개월~1년 빨리 신제품을 내놓는 '속도전'과 생산성 향상을 통한 가격인하 전략을 구사하며 일본업체를 추격했다. 과거 LCD 시장을 장악할 때 5세대에서 6세대를 건너뛰고 곧장 7세대를 세계 최초로 양산,TV의 대형화를 이끌던 전략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결과 2007년 세계시장 점유율을 10% 선까지 끌어올렸고,올해 점유율은 20%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의 TDK와 타이요를 제치고 세계시장 점유율 2위에 오른 것이다. 1위는 일본의 무라타제작소가 확고히 지키고 있지만 일본 내에선 삼성전기의 부상을 잔뜩 경계하고 있다. 최근 무라타제작소가 삼성전기에 특허소송을 제기한 것은 강력한 견제심리가 작동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