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부터 기축통화 역할을 해 온 미국 달러화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트리핀의 딜레마에 빠져들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이를 잘 해결하지 못할 경우 달러화 가치가 폭락해 세계 금융시장이 마비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유승경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24일 '달러 위기론과 국제 통화질서의 현주소'라는 보고서를 통해 "현재 달러화가 직면한 상황은 반세기 전 로버트 트리핀 미국 예일대 교수가 지적한 기축통화의 딜레마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밝혔다.


트리핀 교수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기축통화라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고 1960년 진단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금 1온스의 가격을 35달러로 고정해 태환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국가의 통화는 조정 가능한 환율로 달러로 바꿀 수 있도록 해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그런데 트리핀 교수는 단일 기축통화가 오래 가기 힘든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축통화 발행국은 기축통화의 국제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수지(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해야 하는데 이는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만약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펴면 경기 침체를 불러 역시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레스터 서로 미 MIT 교수는 이와 관련,"한 나라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되면 다른 나라에서 돈을 빌려와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돼 부채와 이자 규모가 너무 커지면 다른 나라는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며 "바로 그때 극적인 변화가 시작된다"고 말한 바 있다.

문제는 바로 극적인 변화가 언제 시작되느냐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은 달러 가치의 폭락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지만 다른 국가 통화의 경쟁력이 약해 기축통화가 바뀌는 일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 연구위원은 "미국이 여전히 세계1위 경제력을 갖고 있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며 "다만 유로화와 중국 위안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일부 맡는 다기축통화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위안화는 자본 통제와 위안화 채권시장의 미발달이 독자적인 기축통화가 되는 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고 유로화는 유럽 국가들의 정치가 통합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달러를 완전하게 대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

◆로버트 트리핀 교수=벨기에 출신의 미 예일대 교수로 1950년대부터 1993년까지 왕성히 활동한 경제학자이다. 그는 브레턴우즈 체제 성립 이후 기축통화(Key Currency)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60년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심각해져 의회가 청문회를 열었을 때 기축통화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한 이후 트리핀 딜레마라는 말이 널리 인용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