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에겐 쥐꼬리 배상…기업 치명적 이미지 손상

얼마전 뉴스를 검색하다가 조그만한 단신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온라인 오픈마켓 옥션의 개인 정보 유출로 피해를 봤다며 14만여명이 낸 집단 손해 배상 소송 선고를 내년 2월까지 미루기로 했다는 것. 재판부는 "당초 다음주에 선고 공판을 열 예정이었지만 원고측에서 새로운 주장을 제기해, 다시 심리를 거친 뒤 내년 초에 선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4월 개인 정보 유출 사태 이후 14만6000여명이 옥션을 상대로 29건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뉴스 보다보면 기업을 상대로 한 소비자들의 집단소송 기사가 가끔 눈에 띈다. 공익적 측면이 강한 집단소송은 대기업 횡포 등으로 피해를 본 힘없는 '개미'들이 힘을 모아 소비자 권리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무한경쟁 시대에 들어선 법률시장에서 '한탕주의'를 노린 일부 변호사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전문 브로커가 집단소송을 부추겨 부작용을 낳는가 하면 인터넷 카페에서 수임료를 떼먹는 사기꾼까지 나타나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는 사례도 있다.

집단소송은 기업들의 무단 개인정보사용이나 직접적인 제품고장 등의 사유로 피해자가 인터넷 카페 등을 개설해 피해사례를 모으고 대안을 모색하면서 움텄다. 또 이 같은 소비자들의 불만이나 피해 상황을 발견한 변호사들이 인터넷을 통해 집단소송인단을 모집하고 변호에 나서게 된다.

집단소송을 기획하는 변호사들은 피해자들이 알지 못하는 소비자 권리를 알려주고 피해 회복을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 효과를 낳고 있다. 1인당 1만~3만원 정도의 적은 소송비용만 받고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므로 피해자 입장에서는 좋은 점이 있다.

하나로텔레콤 정보 유출 소송을 냈던 한 변호사는 "소송인단 대부분이 개인정보 보호에 무신경한 대기업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소송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원고인단이 10만명가량의 대규모일 경우 1심에서 승소만 하면 다른 사건에 비해 훨씬 빨리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기업이 1심 패소판결을 받고 항소하려면 송달 비용만 100억원가량을 부담해야 하므로 1∼3년 걸리는 다른 민사사건보다 훨씬 일찍 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집단소송은 변호사간의 경쟁으로 본질 자체가 오도되거나 소비자가 받아야 할 손해배상이 작아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얼마 전, LG텔레콤을 상대로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 279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법원은 1인당 5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변호사에게 우선 지급하는 소송참가비용 3만원, 역시 변호사에게 돌아가는 성공보수 30%인 1만5000원 등 변호사 수임료를 제외하면 피해자의 손에 고작 5000원이 남는다.

이마저도 인지 대나 소송과정에서 쏟은 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오히려 정작 소송인 단은 손해인 실정이다.

다른 집단소송도 마찬가지다. 국민은행 이메일 유출 사건은 300만원 제기에 10만원(2심 항소심은 20만원) 판결을, LG전자 채용 개인정보 유출은 2천만 원 제기에 30만원을 받아냈다. 피해자가 1000만 명이 넘는 GS칼텍스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나 옥션 해킹피해 사건은 두 사건이 직원의 직접적인 과실에 의한 유출과 고도의 해킹범죄단의 공격에 의한 피해의 경우로 다르긴 하지만 두 건 모두 집단소송이 한창이다.

자동차 등 주요 제조업체도 집단소송의 타깃이 되고 있다. 기아 차의 쏘렌토 구입 고객 320여명은 차량에 하자가 있다며 6억 원을 청구했었다. 이 밖에도 KT&G는 폐암환자와 유족 31명으로부터 흡연으로 인한 암 발병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고 터보테크ㆍ두산산업개발 등은 소액주주들이 분식회계로 주가피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도 초비상이다. 증권관련 집단소송의 경우 대기업들은 투명회계가 자리잡아 소송을 당할 건수가 거의 없지만, 예상치 못한 사소한 실수로 시도 때도 없이 집단소송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가 와 내수침체, 북한 핵실험 사태 등으로 경영환경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집단소송이라는 복병이 기업의 스트레스를 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반(反)기업 정서도 한몫 한다는 분석이다. '일단 소송부터 걸자'는 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집단 소송을 이끌어나가는 변호사들의 행태다. 일부 집단소송의 경우 일단 접수금 조로 몇 만원의 참가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데다가 수임료 또한 기업으로부터 받는 보상금의 20~30% 선에 달하고 있기에 경쟁적으로 소송인단을 모집하고 있다.

집단소송 수임 경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보상금 청구가 어려운 건이나 도저히 그 정도의 금액을 청구하기 어렵지만 일단 지르고 본다는 소송인 단 모집 홍보 전으로 치닫게 되는 현상이다. 물론 성공하든 실패하든 변호사 측은 수익을 내는 것은 물론 과정에서 이름도 내게 마련이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과도한 소송이 기업경영을 위축시키고 투자의욕을 꺾으며 기업가 정신과 창의력을 저해한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에 잘못이 있으면 고객들이 법적 절차를 통해 권익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막대한 소송부담은 차치하고라도 집단소송에 걸리면 소송내용에 상관없이 부도덕한 기업처럼 비쳐져 대외이미지가 치명적으로 훼손될 수 있어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다시 말해 결국 소송에서 이겨 진실을 규명하더라도 이미 집단소송의 상대가 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에 보상을 받아야 하는 소송인 단에 혜택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기업은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발생하는 소송에 대처하느라 기업의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 하게 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집단소송이 잃어버린 소비자 권리를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소송 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 무분별한 소송을 양산하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만 증가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경닷컴 박세환 기자 gre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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