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엔 피죤~'으로 유명한 ㈜피죤의 '피죤(Pigeon)'은 국내 섬유유연제의 대명사이지만 해외에서는 영문 브랜드를 못 쓴다. 상호가 유사한 일본 유아용품 업체가 먼저 'Pigeon' 브랜드를 세계 각국에 등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매하지 않는 섬유유연제와 세제까지 'Pigeon'으로 등록해 선수를 쳤다.

㈜피죤은 중국시장에서 자사 제품을 '碧珍(중국 발음으로 '비전')'으로 표기해 판매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포천 · 이동 막걸리'를 미리 상표등록한 데 이어 또다시 일본 업체에 '상표 도둑질'을 당하게 생겼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재팬피죤과의 악연

'Pigeon' 브랜드를 둘러싼 악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피죤 주식회사'(이하 재팬피죤)는 젖병,젖꼭지 등을 주로 판매하는 유아용품 전문업체다. 자사의 'PIGEON' 상표를 기반으로 1990년대 초부터 한국시장에 눈독을 들여왔다. 재팬피죤과 무관한 순수 국내업체인 ㈜피죤은 재팬피죤의 국내 진입을 막으려 했으나 상표가 유사해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판단에 따라 한발 양보해 손잡기로 했다.

㈜피죤은 1999년 상표사용 라이선스 및 수입 · 판매 계약을 맺고 재팬피죤의 유아용품 판매를 대행해줬다. 이 때문에 ㈜피죤은 자체 유아용품 브랜드가 있지만 이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계약에는 전임 경영진의 주의 소홀로 ㈜피죤의 등록상표 사용권 제한 등 불공정한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뒤늦게 이를 파악한 ㈜피죤 측에서 계약 수정을 요구하고,대안으로 합작사 설립을 제안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

각국에서 'Pigeon' 상표 선점당해

재팬피죤은 유아용품은 물론 자신의 영역이 아닌 섬유유연제,세제 등 생활용품까지 'Pigeon' 브랜드를 북미,유럽,아시아 각국에 상표등록했다. 심지어 해외에서 'Pigeon' 브랜드를 사용하려면 로열티를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피죤은 영국,독일에서 재팬피죤보다 1년 늦은 2005년 상표등록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미국 캐나다 등 북미시장에서도 제품 취급 및 판매 가능한 품목이 제한돼 글로벌 영업전략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피죤의 전략시장인 중국에서도 재팬피죤이 한 발 빨랐다. ㈜피죤은 현재 중국에 공장을 건립하고 섬유유연제를 생산 · 판매하지만 재팬피죤의 상표 선점 탓에 영문 브랜드를 쓰지 못하고 있다. ㈜피죤은 중국 국가공상행정관리총국에 상표사용 무효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피죤,독자 유아용품 출시키로

문제는 양사의 계약이 내년 1월31일자로 종료된 이후다. 재팬피죤은 국내에서 다른 업체와 제휴해 'Pigeon' 상표가 붙은 유아용품 사업을 본격 확대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되면 국내 소비자들은 재팬피죤 제품을 ㈜피죤의 제품인 양 오인할 수 있다. 국내 생활용품 부문에서 6년 연속 브랜드파워 1위인 '피죤'의 인지도에 편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피죤은 계약이 해지되는 내년 2월부터 유아용품 사업에 진출해 맞불을 놓기로 했다. 유아용 유연제,물티슈,젖병 세정제로 이뤄진 '피죤 베이비'와 유아용 액체세제 '액츠 베이비'로 제품군을 재정비한다. 또 수유용품과 스킨케어 제품으로 이뤄진 '피죤 보쥴(Beau Jules)' 브랜드도 새롭게 론칭한다. 피죤 관계자는 "㈜피죤은 국내에서 탄탄한 브랜드 가치를 구축해 왔고 이제 세계로 눈을 돌리려는데 재팬피죤이 해외에서 'Pigeon' 상표를 선점한 이상 대립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