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회식이 끝날 무렵인 저녁 9시.팀내 막내급인 김 과장과 이 대리는 야릇한 눈빛을 교환한다. 1차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팀장인 박 부장이 "2차를 쏘겠다"고 제안한다. 김 과장,이대리는 집에 일이 있다며 완곡하게 거절한다. "요즘 야근 많이 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일찍 들어가시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헤어지고 난 20분 뒤.박 부장을 뺀 팀원 4명이 다시 모였다. 장소는 서울 명동의 한 스크린 골프장.매주 수요일마다 갖는 스크린 골프를 위해서다.

직장인들의 취미생활이 바뀌고 있다. 주요 놀이였던 화투나 카드게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대신 당구가 다시 주요 취미 활동으로 환생했다. 스크린 골프를 즐기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다. 용돈을 아껴가며 실제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는 김 과장,이 대리도 늘고 있다.

◆직딩들 골프에 빠지다

국내 중견 IT(정보기술)회사에 다니는 김성도 과장(38).그는 일주일에 한 번은 출근길에 디지털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긴다. 골프연습장에서 이른바 '나스모(나의 스윙 모션)'를 찍기 위해서다. 연습장에 가기 위해 웬만한 저녁 약속은 잡지 않는다. 물론 필드에는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나가는 게 고작이다. 그렇지만 연습장에서 골프연습을 하는 것만으로 그의 골프실력은 일취월장하는 중이다. 스윙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으로 보내면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인터넷 동호회 덕분이다. 김 과장은 "비록 연습장이나 스크린 골프이긴 하지만,골프를 즐기는 직장인들이 열에 두세 명은 될 것"이라며 "100명 중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 했던 4~5년 전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필드에 나가서 직접 라운딩을 하기엔 직장인들의 지갑이 너무 얇다. 그렇지만 필드에 나가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싼값에 골프를 즐기기 위한 노하우가 적지 않은 덕분이다. 이들은 가능한 한 라운딩 비용을 10만원 선으로 묶기 위해 애쓴다. 이를 위해 인터넷을 통해 퍼블릭 골프장 이용권을 싸게 구입한다. 18홀이 아닌 9홀만 치는 '반타작 골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주말 야간경기도 불사한다. 3시간 넘게 걸리는 골프장을 애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김 과장은 "2차 술값을 한두 번 아끼면 얼마든지 필드 골프도 즐길 수 있다"며 "이제 골프는 부자나 높은 사람들의 애용물이 아닌 보통 직장인들의 취미활동"이라고 말했다.

◆스크린족 "필드가 별거냐"

정유회사에 다니는 차모 대리(29)도 최근 골프에 감염됐다. 아직 필드에 나간 적은 없다. 그렇지만 스크린 골프장에선 알아주는 실력파다. 차 대리는 처음엔 "월급쟁이가 무슨 골프를?"했다. 그러나 웬걸.한두 번 스크린 골프장에 가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우선 값이 쌌다. 1인당 2만~2만5000원(18홀기준)이면 충분했다. 더욱이 동료들과 게임도 할 수 있다. 차 대리는 당장 회사 내 동호회에도 가입했다. 그는 "서너 시간 신나게 게임을 즐기다보면 술도 깨고,비용도 많아야 1인당 3만원 안팎이어서 부담도 없다"고 스크린 골프 예찬론을 늘어놨다.

스크린 골퍼가 늘어나면서 회식문화도 바뀌고 있다. 일부에서는 2차 스크린 골프를 위해 1차 때 술 안 먹기 경쟁까지 벌어진다. 유명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백모 과장(34)은 얼마 전 광고팀과 홍보팀 간 팀대항 스크린 골프 내기를 했다. 비용은 사내 복지카드로 지불했다. 복지카드에 '스크린 골프에 써도 좋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는 덕분이다.

◆젊은 골퍼에 대한 이중성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이모 대리(31)는 골프광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남들보다 일찍 골프를 시작했다. 덕분에 30대 초반의 나이에 싱글의 실력을 자랑한다. 우연찮게 이 대리의 골프 실력을 전해 들은 담당 임원은 거래업체 사람들과 필드에 나갈 때 그를 대동했다. 이 대리 덕분에 친선 골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이후 이 임원은 필드에 나갈 기회만 생기면 이 대리를 호출한다. 이 대리는 "입사 초기만 해도 골프를 친다는 얘기도 못 꺼냈는데 지금은 한수 가르쳐 달라는 윗사람들이 많다"며 "젊은 사람들이 골프 치는 것에 대한 시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고 전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진수 과장(35)은 지난 9월 동기 3명과 함께 회사 창립기념일에 서울 인근 골프장을 찾았다. 라운딩을 끝낸 뒤 샤워장에서 우연찮게 회사 임원과 맞닥뜨렸다. 아무 생각 없이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그는 다음 날 혼쭐이 났다. 팀장은 이 과장을 불러 "요즘 업무실적이 시원치 않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이라며 호통을 쳤다. 나이 어린 과장들이 몰려 다니며 골프치는 걸 못 마땅하게 여긴 임원이 팀장을 통해 경고를 내린 것.

◆당구의 부활

스크린 골프에 대항할 만한 직장인 놀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바로 당구다.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로 부쩍 늘어난 대표적인 놀이시설이 당구장이다. PC방과 노래방 등에 밀려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던 서울 강남에도 하나둘 당구장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울 구로디지털 단지 벤처기업에 다니는 안형석 대리(31)는 요즘 당구장을 자주 찾는다. 당구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모시고 있는 과장이나 차장이 툭하면 호출하기 때문이다. 안 대리 사무실에서는 작년 경제위기 이후 팀내 회식비가 적어지자 당구장으로 2차를 갔다. 처음엔 어색했다. '당구장 2차'가 몇 차례 반복되면서 과장 및 차장이 학창시절의 '실력'과 '열정'을 되찾았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1차도 없이 당구장으로 직행하기도 한다. 안 대리는 "짧은 시간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동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는 당구만한 게 없다"며 "술 안 마시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당구 인기도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화투 · 카드 "아,옛날이여"

중견기업에 다니는 정모 부장(50)은 얼마 전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가 부하직원들에게 면박을 당했다. 저녁 회식자리에 가서 무심코 "밥이 나올 때까지 30분만 치는 게 어때?"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화투를 치자고 제의한 정 부장을 부하직원들은 '화성에서 온 사람'쯤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칠 줄 모르는데요"라고 답한 직원도 있었다. "화투도 치지 않고,술도 마시지 않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느냐"며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넘겼지만,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정 부장은 "식사자리에서 30분씩 화투를 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문화가 많이 바뀐 것 같다"며 "부하직원들과 어울리려면 다시 당구를 시작해야겠다"고 말했다.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카드게임도 시들해졌다. 금융회사의 김모 차장(42)은 "업무가 끝나면 식당에 몰려가 2~3시간씩 카드게임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전했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면서 직장인들의 취미생활도 변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관우/이정호/김동윤/정인설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