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은 강하다. 치밀함과 카리스마도 갖췄다. '덕만공주'도 마찬가지다. 상식을 뛰어넘는 혜안과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 TV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과 덕만공주 얘기다. 둘은 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 신라를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드라마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직장에서는 어떨까. 미실이나 덕만공주를 뺨칠 만한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 존재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분분하다. 한가지 분명한 점은 직장 내 여직원들의 파워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정생활마저 여성 위주로 움직이는,이른바 '신(新)모계사회'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더욱 그렇다.

◆여성 상사 모시기는 힘들어

중견 기업 상품개발팀에 근무하는 이모 대리(31)는 '들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팀장을 모시느라 죽을 맛이다. 팀장은 별명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성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지녔다. 남자 부하직원을 깨는 일은 다반사다. 술자리에서 대드는 부하직원을 박살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억센 여자다. 게다가 회장의 친인척이라 '들개'의 권력은 막강하기까지 하다.

'들개'에게도 장점이 많다. 과감한 추진력을 지녀 회사 경영진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 후배들도 제법 따른다.

하지만 이 대리에게 '들개'는 어렵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밥 먹듯 야근을 외쳐댄다. 하루에도 감정 기복이 심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이 대리는 "아무래도 노처녀 히스테리도 있는 것 같다"며 불만을 토해냈다. 남자 상사였다면 술잔이라도 기울이면서 얄팍한 친분(?) 형성을 시도해볼 법도 한데,여자 상사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게 이 대리의 고민이다.

직장 여성 상사 중에는 '들개'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존재는 오히려 드물다. 팀이나 부서를 이끌고 있는 여성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남자 상사 모시기에 익숙한 남자 부하직원들이 단기간 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건 사실이다.

◆여성이 아닌,동료로 대해 달라

직장생활 6년차에 접어든 김모 주임(29 · 여)은 대학 마지막 학기에 입사가 결정됐다. 한 학기도 휴학하지 않고 졸업 전에 취업한 능력의 소유자다. 입사 이후엔 항상 '최연소'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김 주임은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기가 질릴 정도로 성질을 부릴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 선배라고 고깝게 보는 남자 후배들 앞에서다.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남자 선배들 앞에서도 상냥해지지 못한다는 게 김 주임의 말이다.

그는 "여자들은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싸잡아' 말하는 건 금물"이라고 충고했다. 또 여자들의 취향에 맞추고자 '오버'하지도 말고 폄훼하지도 말라고 덧붙였다. 김 주임은 "점심으로 샌드위치 먹는 게 자기 스타일이 아니면 그렇다고 말하면 된다"며 "억지로 따라올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여성이 아닌,직장 동료로 대해 달라는 주문이다.

◆내가 여성화되고 있다고?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는 최모 대리(32)는 팀원 4명 중 유일한 '청일점'이다. 그러다보니 팀내 문화도 여성스럽다. 회식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시작해 영화 · 공연 관람으로 마무리된다. '부어라 마셔라' 해대는 광란의(?) 술자리 회식은 꿈도 꾸지 못한다.

최 대리는 이런 문화에 익숙하다. 폭음한 뒤 아픈 속을 달래려 해장국집을 찾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여성 팀장을 모시는 것도 자연스럽다. 여자 동료들과 일하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여자나 남자나 능력과 직급에 맞게 일할 뿐 다른 게 없다"는 게 최 대리의 설명이다. 이런 문화를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반응은 뜨악하다. 언젠가 한 친구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일해서 그런지 완전 여성스러워졌다"고 놀려댔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5)도 최 대리와 비슷한 처지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째 말투가 여성스럽다"거나,"터프 가이도 많이 변했네"라고 말한다. 매일 얼굴을 맞대는 부모님마저 똑같은 얘기를 한다. 김 과장이 소속한 팀은 10명.2명을 제외한 8명이 여성이다. 김 과장은 "1년6개월 동안 여자 동료들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여자 동료들의 말투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다"고 자신의 행동 변화를 스스로 분석했다.

유난히 동기애가 끈끈한 중견 기업의 성모 사원(29)은 입사동기 12명 중 9명이 여자다. 처음에는 목소리 크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 동기들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여자 동기들이 주도해 정례화된 와인과 함께하는 동기모임에도 익숙해졌다. 동기 전체의 의견을 모을 때도 여자 동기 중심으로 굴러가는 것에 이제는 불만이 없다. 오히려 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부장이 남자 동기들 3명을 싸잡아 툭툭 내뱉는 말이 자존심을 긁는다. "너네 기수 남자들은 어째 그리 하나같이 유약하냐? 여자들한테 질질 끌려나 다니고…."

◆설거지 하면 어때?

직장에서만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진 건 아니다. 집에서도 비슷하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인 박모 과장(35)은 연상의 아내와 맞벌이를 하고 있다. 박 과장은 퇴근 후 저녁 준비와 설거지 등을 전담한다. 아내의 연봉이 박 과장보다 훨씬 많다 보니'집안일이라도 내가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능력 있는 아내는 당당하다. 지난해 아내는 7년 근속 때 주어지는 휴가 기간 동안 친정 부모님과 한 달간 여행을 다녀왔다. 박 과장의 부모는 노발대발했다. "결혼한 주부가 남편 혼자 놔두고 한 달간 장기 여행을 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직장 동료나 친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러나 박 과장은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여행가는데 뭐 어떠냐"는 아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처가살이가 더 좋아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3)은 매주 금요일 처가에 간다. 장모가 키우고 있는 두 살짜리 아들을 보기 위해서다. 주말에 처남과 함께 운동하고 장인과 바둑을 둔다. 매주 주말을 처가 식구와 지내다 보니 거의 한 가족이 됐다. "아들을 새로 얻었다"며 기뻐하는 장인 장모 모습도 보기 좋지만,무엇보다 아내가 한결 여유로워진 게 마음에 든다. 육아 부담이 줄어서인지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바가지 긁는 횟수도 부쩍 줄었다. 김 과장은 "요즘 아들보다 딸을 낳을 때 더 축하받는 이유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점은 박 과장이나 김 과장이 현 생활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맞벌이를 후회하지 않는다. 처가 위주로 가정생활이 이뤄지는데도 불만이 없다. 둘이 벌면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서 좋다. 처가 위주로 생활하면 부부 관계가 원활해서 좋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바야흐로 '신모계사회'다.

이고운/이관우/이정호/김동윤/정인설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