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통근열차인 캘트레인(Caltrain)을 타고 20분쯤 남쪽으로 내려가면 '팰로알토(Palo Alto)'라는 조용한 도시가 나타난다. 실리콘밸리에 속하는 이곳에 세계 디자인 컨설팅 업계의 최강자로 꼽히는'아이디오(IDEO)'본사가 자리잡고 있다. 최강자에 어울리는 멋진 본사 건물을 기대했던 기자는 아이디오가 회사로고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임대건물에 세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HP, AT&T, BBC, 미 우주항공우주국(NASA)과 삼성, LG,SK텔레콤 등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IDEO의 고객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회의 '브레인스토밍'원칙

IDEO는 산업 디자인 회사로 출발했다. 때문에 IDEO가 원래 창의적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회사에는 디자이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류학자, 건축가, 엔지니어, 심리학자 등 다양한 전공 분야의 직원들이 섞여 있다.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디자인 컨설팅 요청은 풍부한 리서치와 현장 경험으로 출발하지만 IDEO 경쟁력의 원천은 직원들이 내놓는 아이디어에 달려 있다. 그 원천의 핵심에는 IDEO만의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 자리잡고 있다. 마케팅 업무를 하는 앨버트 첸은 "IDEO는 별다른 근무수칙이나 규칙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브레인스토밍만큼은 철저한 원칙을 준수하도록 돼 있다"고 소개했다.

일단 통상 회의시간은 1시간~1시간 반을 기준으로 한다. 회의가 길다고 자유로운 아이디어가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브레인스토밍에서는 질(質)보다 양(量)에 충실하다. 한 사람이 1시간 동안 많게는 100여개의 아이디어를 주저없이 생각나는 대로 던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 다른 사람 의견을 그 자리에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한국계 미국인으로 HR(인적자원) 부서를 맡고 있는 다나 조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에 다른 팀원들이 살을 붙이면서 격려한다"며 "정말 말이 안되는 의견에 대해서도 '흥미로운데''새롭군'이란 칭찬을 하고 넘어간다"고 귀띔했다.

아이디어의 실현 여부 등을 회의 자리에서 지적하고 평가하는 순간 팀원들의 창의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대신 사회자는 회의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분위기를 잡는다. 쏟아져 나온 아이디어를 팀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화이트보드나 벽 사방에 적어놓고 상호 관계를 표시하는 것도 좋은 방법.시각적으로 구체적일수록 더욱 시너지가 생긴다.

조씨는 "상급자가 일대 연설을 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정해진 순서대로 팀원들이 의견을 발표하는 식은 별로 창의적이지 않다는 게 우리의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디자인'에서 '컨설팅'으로

미국 내 수백 개 의료시설을 보유하고 있어 미국 내 가장 큰 의료 기관 중 하나로 꼽히는 '카이저 퍼머넌트 병원'은 벌써 약 5년간 IDEO와 일하고 있는 고객이다. 카이저는 맨 처음 비용을 줄이고 병원 운영을 정비하기 위해 IDEO를 찾았다. 이후 카이저의 의료진과 IDEO팀은 함께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의 역할을 경험하게 되면서 놀라운 혁신방안을 찾게 됐다. IDEO의 심리학자들은 환자들이 딱딱한 분위기의 로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 감각을 잃고 진료실에 들어와서도 의사를 보기까지 반쯤 벌거벗은 채 혼자 약 2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결국 안내 표지판이 잘 보이는 밝은 분위기의 로비, 보호자나 친구들과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보다 넓어진 진료실,프라이버시를 극대화한 커튼을 만들었다. 또 의료진이 복도 한켠에서 즉석 회의를 할 수 있도록 고쳤다. 카이저 병원 측은 "IDEO가 많은 비용을 들여 새로운 시설을 만들지 않고도 마치 '쇼핑'처럼 안락하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해줬다"며 "병원과 환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미국의 유명 경제잡지 '비즈니스위크'가 2004년 IDEO에 대해 "소비자 용품을 디자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쇼핑 의료 은행 이동통신 등 각종 서비스와 소비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단계로 변신하고 있다"며 "이제 IDEO는 맥킨지나 보스턴컨설팅과 같은 경영컨설팅 기업들의 라이벌이 되고 있다"고 평했을 정도다. IDEO의 대외업무 담당자 크리스틴 헨드릭슨은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은 끊임없이 창의성을 추구하는 기업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평가했다.

샌프란시스코(미국)=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