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깊은 수렁에 빠졌던 세계 경제가 미국 중국 등 주요국을 중심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일본은 예외다.

일본은 지난해 말 금융위기의 당사국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요국 중 실물경제 타격이 가장 깊었다.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 시장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도요타자동차 소니 도시바 등 일본의 간판 제조업체들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적자를 면치 못할 전망이다. 한국의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V자 회복을 보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수 침체가 장기화해 '재테크 기상도'도 어둡다. 도쿄 증시는 세계 주요 증시 중 거의 유일하게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부동산 가격도 하락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엔 달러 약세에 따른 엔고 현상마저 나타나 일본 경제의 회복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기지개 못 켜는 일본 증시

최근 세계 주요 증시가 전반적인 회복세를 타고 있지만 일본 증시는 무기력한 모습이다. 일본의 8 · 30 총선 직전인 8월28일부터 9월30일까지 한 달간 주요국 증시 추이를 보면 도쿄 증시만 부진하다. 실제 이 기간 중 일본 증시는 3.8% 하락했다. 미국 뉴욕 증시가 2.1%,영국은 5.1%,독일은 3.5% 상승하면서 나란히 연중 최고치를 경신한 것과 대조적이다.

도쿄 증시의 부진은 주력주인 수출주가 힘을 못쓰고 있기 때문이다. 도요타자동차와 파나소닉은 이 기간 11%대의 하락률을 보였다. 엔고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내수 부진 등으로 실적 악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수출주가 맥을 못추고 있는 것이다.

금융주는 폭락 수준이다. 대표적 금융주인 미쓰비시UFJ홀딩스는 이 기간 20% 정도 급락했다. 가메이 시즈카 금융상이 중소기업의 대출금 상환을 3년간 유예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은행의 실적 악화 우려가 나오자 투자자들이 주식을 투매했다.

일본 증시는 향후 전망도 밝지 않다. 경제 회복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어서다. 일본의 실업률은 사상 최악을 기록하고,소비자물가는 사상 최대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부동산도 계속 추락

미국 중국 영국 등 주요국 부동산시장이 뚜렷한 회복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유독 일본의 부동산 경기만 한겨울이다. 일본은 아직도 땅값 하락세가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 국토교통성이 최근 발표한 지난 7월1일 현재 전국의 기준지가는 1년 전에 비해 4.4% 하락했다. 일본의 기준지가는 지난해 1.2% 내린 데 이어 낙폭이 더 커졌다. 지난해까지 상승했던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도시권도 2005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내림세로 돌아섰다.

작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부동산시장에서 외국 자본이 철수한 게 가장 큰 요인이다. 게다가 일본 기업들도 경비 절약을 위해 도심지 사무실을 줄이거나 변두리로 이전하면서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었다. 용도별로는 상업용지가 5.9%,주택용지는 4.0% 하락했다. 상업용지는 2년 연속,주택용지는 18년째 떨어졌다. 지난해 상업용지가 0.8%,주택용지가 1.2% 내린 것에 비해 올해는 낙폭이 더 커졌다.

도쿄 등 수도권의 아파트 분양은 13개월 연속 감소세다. 올 들어서는 감소폭이 50%를 넘어 1996년 10월 이후 최악이다. 일본 부동산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8월 수도권 아파트 신규 분양가는 한 채당 평균 4314만엔(약 5억7000만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0.1% 하락했다.

◆디플레의 어두운 그림자

주식 부동산도 시원치 않은 일본 경제에는 이미 디플레이션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소비자물가(8월)는 2.4% 하락해 사상 최대 하락폭을 보였다. 실업률 역시 5.7%(7월)로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53년 4월 이후 최악이다.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실업자 수는 359만명으로 1년 전에 비해 103만명 증가했다. 여기에 정부가 고용 유지를 위해 기업에 지원하는 고용유지 지원금을 받는 사람은 7월 현재 243만2500명으로 전달 대비 2.1% 늘었다. 정부 지원금이 끊기면 잠재적 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실업률이 높은 상태에서 소비자물가 하락은 계속되고 있다. 실제 일본의 소비재상품 가격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올 4~7월 전국 슈퍼마켓의 식료품과 일용품 60개 품목을 조사한 결과 60%인 34개 품목의 가격이 하락했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매출 부진이 지속되자 기업들이 상품 가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업 실적 악화로 연결되면서 성장 둔화를 촉진해 고용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노구치 유키오 와세다대 파이낸스연구과 교수는 "일본 경제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다시 추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