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체들이 건조를 끝냈는데도 주인들이 '찾아가지 않는' 선박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해운 수요가 급감한 데다 선박자금 조달마저 어려워지면서 외국의 선주(船主)들이 발주한 선박을 인수해가지 않아서다. 이 때문에 부산항과 남해안 곳곳에는 이들 '임자없는 배'들이 마치 유령선처럼 짧게는 수개월,길게는 1년 가까이 바다 위에 떠있다. 조선업체들이 새로 만든 선박을 바다에 띄워 놓고 주인이 찾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14일 부산 영도구 태종대 앞바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물동량이 줄어 30여척의 선박이 발이 묶여 있는 가운데 신조선 컨테이너선도 눈에 띄었다. 몰타공화국의 한 선주가 국내의 대형 조선업체인 A사에 발주한 뒤 잔금을 치르지 못해 인수를 미루고 있는 대형 컨테이너선 3척이다.

이 가운데 7만4175t급 1척은 지난해 10월9일부터,다른 7만4175t급 1척은 지난 4월19일부터 장기 정박 중이다. 또다른 7만t급 컨테이너선 1척은 지난 5월22일부터 닻을 내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부산지방해양청 관계자는 "일감이 없는 선박이 장기 정박하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새로 건조된 신조선이 이렇게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말했다.

A사 관계자는 "선주가 자금조달 문제로 잔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는 바람에 선박 인도가 지연되고 있다"며 "이달 중 2척은 선주 측에 넘겨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선박 관련 금융이 워낙 경색돼 있어 선주가 배를 언제쯤 찾아갈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부산항 앞바다의 장기 정박 선박을 관리하는 부산항만공사 관계자는 "선박이 장기 정박할 경우 배의 가치가 떨어지고 수천만원 이상의 선박관리비 및 정박료를 부담해야 한다"며 "정박 중이지만 법적으로 선원들이 6명 정도 타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제 앞바다에도 장기 정박 선박 33척이 머물고 있다. 이 가운데는 선주가 찾아갈 날을 기다리며 제자리서 주기적으로 시운전을 반복하고 있는 장기 정박 선박도 있다. 선박을 그대로 방치하면 엔진 등에 이상이 생길 수 있어서다.

한 선박대리점 관계자는 "외국 선주들이 지난해 초만 해도 빨리 배를 만들어 넘겨달라고 아우성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2개월 정도 빨리 만들어도 인도 시점에 딱맞춰 찾아가거나 아예 찾아가지 않아 시운전만 계속하며 기다려야 하는 등 격세지감을 느낀다"며 "선주들이 인수 시기를 늦추기 위한 구실을 만들고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남해안 지역의 중소 조선업체들 사정도 비슷하다. 일부 조선업체들은 조선소 내에 배를 붙들어 매놓고 있다. 전남 영암군 대불산단 내 B사의 경우 컨테이너선 2척을 지난 7월부터 묶어놓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선주가 선박대금을 치르고도 장사가 되지 않자 인수해가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전남 목포시 삽진산단 내 C사가 지난 4월 건조한 컨테이너선 1척도 인도 시점을 훨씬 넘긴 상태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선주 측이 이 핑계,저 핑계로 클레임을 걸면서 선박을 찾아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전자와 자동차 등 다른 업종은 다시 경기가 살아나는 분위기인데 조선업은 아직도 엄동설한"이라며 "빨리 해운경기가 살아나 선박 수요가 늘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김태현/광주=최성국 기자 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