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영국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약 310㎞ 떨어진 시골 마을 애스턴 헤이즈.한 초등학교에 주민 100여명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마을의 하반기 탄소 배출량 감축 목표'.어느 정도 탄소 배출량을 줄일 것인지를 두고 70,80대의 노인부터 초등학생까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을 끝낸 뒤 소규모 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 설비인 '마이크로 그리드' 도입 방안에 대한 체스터대학 마리 질 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애스턴 헤이즈는 영국 최초로 '탄소중립 커뮤니티(carbon neutral community)'를 추진하는 마을이다. 주민들 스스로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로'로 만든다는 게 목표다. 녹색 바람이 시골 마을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환경친화적 제품을 선호하는 '그린 쇼퍼(green shopper)' 바람도 거세다. 이들은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을 배격하며 기업들의 녹색 변신을 재촉하고 있다.


◆확산되는 '그린 라이프'

애스턴 헤이즈가 탄소중립 커뮤니티를 추진키로 한 것은 2006년.우선 학생들이 마을의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을 조사했다. 주민들은 본격적인 에너지 효율화 작업에 착수했다. 학교와 마을 곳곳에 태양광 전지판과 풍력발전 설비를 설치했다. 집에는 단열마감재를 보충했다. 마을 식품점에서는 포장을 없앴다. 주민들은 친환경 용기를 이용해 쇼핑에 나섰다. 마을을 오가는 차량들도 친환경으로 바뀌었다. 이곳을 취재하기 위해 들어온 공영방송 BBC도 바이오 디젤 차량을 이용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 결과 작년 말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23%나 줄이는 데 성공했다.

애스턴 헤이즈의 사례는 유럽에서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10여년 전 스위스 마터호른 인근의 체르마트가 차 없는 도시를 선언한 이후,'CO₂ 제로'를 선언한 도시는 윈데와 기센,무레크 등 20여곳에 이른다.

이들 도시는 일단 수요 조사를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을 계산한 뒤 에너지 절감 방안을 마련한다. 이후 풍력,지열,태양열 등 신 · 재생 에너지 설비를 도입한다. 각 가정이나 학교,사무실 등 건물별 감축 목표를 할당한다. 이런 운동이 효과를 내려면 주민들의 합의와 의지가 필수적이다. 지역 기업과 중앙정부 등의 적극적인 지원도 '탄소 제로' 마을을 탄생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을만이 아니다. 각 기관이나 건물별로 탄소중립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도 많다. 독일 트리어대학의 환경 전문 단과대인 브리켄펠트가 그런 경우다. 이 대학은 '탄소 제로' 캠퍼스를 지향한다. 남향 창문 전체에는 태양광 전지판이 설치돼 있다. 기숙사 및 강의실의 전력도 태양광 및 지열,바이오 가스를 자체 생산해 사용한다. 학생들은 에너지 자립모델을 통해 자신들의 전공을 연구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한다.


◆기업을 바꾸는 그린 쇼퍼

런던에 살고 있는 가정주부 수전 워커씨(49)는 물건을 살 때 상품에 붙어 있는 라벨을 꼼꼼히 살핀다. 탄소 라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탄소 라벨이란 상품이 만들어져 매장에 나올 때까지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어느 정도인지를 표시하는 상표다.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같은 값이라면 탄소 배출량이 적은 상품을 선택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수전 같은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탄소 라벨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들은 다소 거리가 멀더라도 탄소 라벨을 붙인 상품을 파는 유통업체만을 찾는다. 손님을 뺏기지 않으려면 유통업체들로선 탄소 라벨을 붙일 수밖에 없다.

영국 최대 유통업체인 테스코는 매장에서 팔리는 7만여개 상품 모두에 탄소 라벨을 부착한다는 계획을 세워 착착 실천에 옮기고 있다. 딕슨,막스앤드스펜서 등 영국의 다른 유통업체들도 상품에 탄소 라벨을 부착하고 있다. 테스코는 한 발 더 나아가 수입산 농산물에는 '비행기' 마크를 단다. 항공기로 운반함에 따라 이산화탄소가 그만큼 많이 배출됐다는 표시다.

의식을 가진 소비자가 유통업체를 바꾸고,이는 다시 제조업체를 변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린 쇼퍼가 기업을 바꾸는 셈이다. 이런 현상이 확산되면 저탄소 상품은 앞으로 '저칼로리 상품'과 같은 인기를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뿐만 아니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미국 월마트는 지난 7월 매장에서 판매하는 12만개의 상품에 모두 '녹색등급 라벨'을 부착한다고 발표했다. 가격표와 나란히 부착되는 녹색 라벨에는 공업용수 사용 여부,이산화탄소 배출량,쓰레기 발생량 등 환경 관련 15개 항목이 표시된다. 식료품에 붙는 영양성분 항목처럼 소비자들이 환경친화 제품 여부를 판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월마트는 이를 위해 전 세계 6만여 거래업체에 오는 10월까지 환경 요소와 관련된 제품 정보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만일 일정한 기준의 녹색등급을 얻지 못하면 제품 공급업체 자격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 제조업체들에는 비상이 걸렸다.


◆95%가 잠재적 그린 쇼퍼

그린 쇼퍼는 이미 상당하다. 딜로이트가 최근 미국 소비자 64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2%가 친환경 제품을 구매한 적이 있는 그린 쇼퍼로 나타났다. 5명 중 1명이 친환경 제품을 선호하는 그린 쇼퍼라는 얘기다. 잠재적 그린 쇼퍼는 더욱 많다. 조사 대상자의 63%는 쇼핑 때 친환경 제품을 먼저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75%는 친환경 제품을 인지하고 있었다. 95%는 '친환경 제품을 살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그린 쇼퍼가 소비자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린 쇼퍼들은 제품에 대한 충성도도 매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29.9%는 계획보다 더 자주 쇼핑에 나섰고,43.7%는 예상보다 더 많은 제품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일반 소비자들에 비해 가격에 덜 민감한 반면 한번 구매한 환경 제품을 재구매하는 비율이 훨씬 높았다. 이들이 구입하는 친환경 제품도 확대되고 있다. 초기엔 식료품 등 한두 가지에 국한해 그린 제품을 찾았지만,시간이 지날수록 전자제품 의류 등을 살 때도 '그린'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린 쇼퍼를 연령대로 보면 45~50세가 가장 많았다. 일반 쇼핑객에 비해 고학력자였고 수입도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런던=고경봉 기자/이정호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