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출구 찾다가 멀쩡한 기업 잡을 수도‥"
"자산 버블 잡으려다가 멀쩡한 기업을 잡을 수도 있는데…."

최근 정부 산하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금리 인하 등 각종 경기부양책을 철회해야 한다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제시한 데 대한 한 대기업 임원의 우려 섞인 반응이다. 경기 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금리 인상 같은 긴축 정책을 취할 경우 생존의 기로에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또 정부의 성급한 출구전략이 겨우 살려 놓은 경기 회복의 불씨를 꺼트릴 가능성도 경계하고 있다. 모 기업 관계자는 "이제 막 최악을 벗어나고 있는 상황인데도 일부 기업의 실적 호전과 주가 상승,엔고 환율에 따른 수출 호조 등이 착시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며 "정부는 책상머리에서 지표만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체력을 냉정하게 되짚어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계기업 양산할 가능성 높다

재계는 최근 부동산 등 자산가격 상승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출구전략이 자칫 한계기업을 양산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상무)은 "작년 금융위기가 터진 후 만성적인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기업들의 경우 금리 인상이나 세제 지원 축소 등의 정책에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구조조정을 위해 자산 매각 등을 서두르고 있는 중견기업들의 정상화 몸부림에도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한 중견기업 재무담당 임원은 "그동안 기준금리가 연 5%에서 2%로 인하되는 동안 대출금리는 7%에서 6.5%로 내려 실질적인 혜택을 거의 받지 못 했다"며 "만약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은행들은 6.5%의 여신금리를 8%로 올리려 들 것이기 때문에 모든 구조조정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이 임원은 "금리 인상으로 이자가 올라가는 것도 문제지만 정책기조 변화 자체가 해당 기업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실제 5월 말 현재 국내 은행의 기업대출 연체율은 2.3%로 2005년 5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고 기업들의 채무 상환 능력을 나타내는 이자보상배율 역시 2007년 6.0에서 1분기 말 2.3으로 뚝 떨어진 상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하반기 기업 채산성이 악화되면서 기업 부실이 확대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기업실적과 지표 착시의 문제

국내 일부 대기업이 2분기에 예상밖의 호실적을 내고 있는 것도 출구전략의 부분적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삼성이나 LG의 경우 원저-엔고 환율 덕을 보고 있는 측면이 강한 만큼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사실 외부 변수인 환율 동향이 지금처럼 국내 수출경제에 우호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좋은 실적을 내고 있지만 여기에는 원 · 달러 환율이 1300원 선을 유지한 데다 경쟁 관계인 일본 업체들이 엔고로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며 "이 효과가 과연 하반기에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여기에 IT를 제외한 다른 업종의 2분기 실적은 본격적인 회복세와는 거리가 먼 수준이다. 자동차 회사들의 2분기 실적은 1분기에 비해 호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부의 세제 지원 확대에 따른 특수를 감안하면 하반기 판매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포스코는 어닝 쇼크 수준의 실적을 냈고 정유,해운,항공업체 등의 실적 전망도 그다지 밝지 않다.

거시경제지표의 착시현상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최악을 예상했는데 그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를 과연 본격적인 경기 회복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즉 최악의 눈으로 보면 회복이 분명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 보면 여전히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다. 권 실장은 "정부는 상반기 경제성장률,설비투자 증가율,민간소비 등 대부분의 경제지표가 여전히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