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당신,떠나라."

드디어 떠날 시간이 왔다. 1년 만이다. 보기 지겨운 상사의 얼굴도 잠시 잊고,꽉 끼는 구두와 넥타이도 벗어놓고,신경 쓰이는 휴대폰도 잠재워놓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여름휴가. 직장인의 로망이다.

물론 걸리는 게 있다. 경기불황이니 하는 말들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집 떠나면 돈"이라며 옆구리 콕콕 찔러대는 아내의 경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세숫대야에 발 담그고 휴가를 보낼 수는 없는 일.홍콩의 밤거리가 아니더라도,제주도의 푸른 밤이 아니더라도 어딘가로는 떠나야 한다.

그러다보니 쏟아지는 게 온갖 '짠돌이 휴가법'이다. 가능하면 돈을 덜 쓰면서 효과는 극대화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줄을 잇고 있다. 여름휴가를 아예 공부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거나,휴가를 즐기면서 돈도 벌겠다는 '멀티형 휴가족'도 생겼다.


◆황금 비수기(?)를 노려라

대기업에 다니는 이인기 대리(33)는 올 휴가를 9월 중순으로 잡았다. 휴가 인파가 미어터질 8월을 피한 것은 비용 때문.여름 한철을 사무실에서 나고 비용이 싼 비수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비수기인 9월 중순 이후에 여행을 가면 우선 비행기 삯을 확 줄일 수 있다. 비수기 티켓은 성수기보다 보통 20~30% 싸다.

게다가 비수기에 쏟아지는 항공 특가 상품을 잡으면 휴가 비용은 절반 이상 줄어든다. 이 대리는 필리핀 세부로 가기로 마음먹고 모 항공사의 파격 할인 상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세부 왕복 티켓 값이 고작 10만원.세금을 포함해도 12만원에 불과했다. KTX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돈과 별 차이가 없다. 이 대리는 "성수기 직후에 항공사들이 내놓는 상품을 잘 잡으면 국내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고 말했다.

10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는 금융회사의 김인경 차장(40 · 여)도 '비수기 휴가'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약간의 편법을 쓰기로 했다. 자녀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인 7월 초에 휴가를 떠나기로 한 것.자녀 학교에는 체험학습을 간다고 알리면 그만이다. 그는 "아이로서는 방학이 길어져서 좋고,부모로서는 비용도 적게 드는 데다 일주일 차이로 휴가지에서 훨씬 여유롭게 지낼 수 있어 좋다"고 설명했다.


◆땡처리족,부엉이족,더부살이족…

여름휴가 때마다 해외여행을 즐기는 중견기업의 김성열 대리(33).그는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땡처리 항공권'을 찾는다. 다름아닌 다른 여행객들이 예약했다가 2~3일 전에 취소한 티켓이다. 할인폭이 30~50% 정도로 크다. 김 대리는 "여행사 직원과 형님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다보면 정말 괜찮은 정보를 남보다 빨리 구할 수 있다"고 노하우를 귀띔했다. 다만 이 방법은 언제 어디로 가는 표가 싸게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게 단점이다.

올여름 일주일간 나홀로 일본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광고대행사의 이민아 대리(29 · 여)는 최근 여행계획을 '부엉이 여행'으로 급수정했다. 토요일 새벽에 떠나 월요일 새벽에 돌아오는 1박3일의 실속 여행이다. 한창 나이의 대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여행방법이라 체력이 받쳐줄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휴가비를 당초 계획보다 3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역시 일본으로 결혼 5주년 여행을 준비 중인 조인태 과장(37)은 도쿄에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친한 친구 집에서 숙박을 해결하기로 했다. 조 과장은 "주변을 보면 국내외 친척이나 친구집을 찾는 동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며 "불황기 여름휴가를 보내는 직장인들의 한 단면"이라고 전했다.


◆해외는 무슨? 국내 U턴족 늘어나

당초 처가 식구와 함께 말레이시아 여행을 가기로 했던 전자회사의 이병훈 과장(40)은 최근 국내 U턴을 결심했다. 불황기 여행비를 감당하기엔 가계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장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바루 대신 강화도 캠핑장을 선택했다. 캠핑장 입장료는 4인 가족 기준으로 5000원 안팎.텐트 대여료도 2박3일에 1만원이면 족하다.

하루 20만원 가까이 되는 콘도나 호텔에 비하면 푼돈이다.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바다 근처에 있는 캠핑장으로 가면 갯벌 체험도 할 수 있다. 산에 있는 야영장을 선택하면 아름다운 계곡에서 신선놀음이 가능하다.

이 과장은 "알뜰 휴가의 관건은 교통비와 숙박비를 줄이는 건데 캠핑은 이 두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킨다"며 "가격 대비 효과 면에서 캠핑만큼 좋은 게 없다"고 말했다.


◆휴가도 아까워…'몰공(몰래공부)족'도

대부분 직장인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휴가를 소진한다. 하지만 짧은 휴가를 '내공 다지기'에 헌납하는 '모진' 직장인도 드물지 않다.

중소 제조업체 4년차인 김모 대리(29)는 최근 앞 뒤 토 · 일요일을 포함해 9일간의 휴가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입사 직후 5일간의 여름휴가를 다녀온 지 4년여 만에 감행하는 초장기 휴가인 만큼 주변의 눈치가 보인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름아닌 토익시험 공부를 위해서다. 휴가 9일 동안 24시간 토익시험 모드로 돌입,꿈의 점수인 만점을 받아낸다는 게 김 대리의 목표다.

외국계 회사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원모씨(39)도 이번 휴가엔 첫 번째 토 · 일요일은 유명 물놀이 파크에 다녀온 뒤 월요일부터 공부에 몰두할 생각이다. 그가 준비 중인 것은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시험.생물을 전공한 그는 회사에서 '마이너'전공자로 분류돼 그렇게 원했던 마케팅과 회계 담당자 선정 과정에서 번번이 밀렸다. 그는 "국내에서 여건이 안되면 괌에 가서라도 시험을 치를 생각"이라고 전했다.


◆벌면서 즐기자 '멀티족'

빈털터리 휴가 대신 아르바이트와 휴가를 동시에 해결하는 멀티족도 있다. 전문직종인 IT(정보기술)분야 샐러리맨들이 그들이다. 10년차 웹프로그래머이자 미혼인 구인기씨(35)는 최근 컴퓨터 학원 동기생인 노총각 2명을 규합,3명이 휴가를 함께 떠나기로 계획했다. 단순히 놀자판 휴가가 아니다. 휴가지는 서울 근교의 호텔.낮에는 수영과 볼링 등으로 여유를 즐긴 뒤 저녁에는 셋이 한방에 모여 작업할 계획이다. 작업은 모 프리랜서 사이트에서 알선해 준 중소업체의 홈페이지 개편 작업.매일 새벽까지 집중적으로 일하면 일주일 안에 홈페이지 하나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구씨는 "휴가와 프로젝트를 같은 공간에서 수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편할 것"이라며 "1인당 80여만원이 생기는 만큼 휴가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이정호/이관우/정인설/이상은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