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금의 미국 달러화 자산 매입 기피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금융위기가 진정될 조짐을 보이면서 투자자들의 리스크 선호 성향이 살아난 데다 천문학적인 미 재정적자로 달러자산 가격이 급락할 수도 있다는 전망 때문이다. 신흥경제국 대표주자인 브릭스 4개국이 16일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시에서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갖는 등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도 달러 자산의 매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달러 자산 파는 글로벌 자본

미 재무부가 15일 발표한 자본 유출입 동향에 따르면 4월 외국 자본이 보유한 미 국채는 3조2626억달러로 전달보다 26억달러 줄었다.

외국 자본의 미 국채보유 규모는 작년 7월 이후 꾸준히 늘다가 올 들어 1,2월 두 달 연속 감소세를 보였으나 3월에 증가세로 돌아선 뒤 한 달 만에 다시 줄어든 것이다. 외국 자본은 4월에 10년물 이상 국채를 포함한 미 장기증권을 112억달러 순매수하는 데 그쳤다. 이는 3월 순매수(554억달러)의 5분의 1 수준이다. 미 장기증권 투자는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성향을 볼 수 있는 핵심 잣대로 꼽힌다. 외국 자본은 미 회사채에 대해서도 97억달러를 매도했다. 전달에 35억달러를 미 회사채에 투자한 것과 대조적이다.

달러 자산 기피는 원자재 시장과 글로벌 증시 랠리로 위험회피 경향이 둔화됐기 때문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또 미 재정적자 확대로 달러자산의 매력이 떨어진 것도 한 요인이다. UBS의 베네딕크 게마니어 통화전략가는 "위험자산을 선호하는 랠리가 지난 3월 시작되면서 미국 이외 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브릭스의 달러 흔들기도 달러 자산 기피를 보여주고 있다. 브릭스 중 인도를 제외한 3개국은 4월에 모두 64억달러의 미 국채를 팔았다. 중국이 미 국채를 줄인 것은 지난해 2월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달러가치 하락은 2조8000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브릭스의 손실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브릭스가 급격히 달러자산을 대거 매각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브릭스발 세계질서 재편 시동

이날 브릭스 정상들은 미국 주도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논의에 집중했다. 달러 기축통화 문제를 비롯해 △투기적인 서방의 금융회사 규제 △국제금융기구 개혁 △식량 및 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협약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의제 등에 대해 의견을 조율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새 기축통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날 회담에선 브릭스 간 무역결제시 자국통화를 사용하고 외환보유액을 상대방국가의 국채에 투자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이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정상은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투기자본 규제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회담 참석 전날 "투기 목적이 아닌 생산부문에 자본이 투입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세계경제 질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룰라 대통령은 "새 질서는 환경보호와 글로벌무역 확대 및 부의 공정한 재분배 등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릭스 정상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의결권 확대 등 국제금융기구 개혁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브라질과 인도가 추진 중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도 논의됐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지지를 받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상들은 또 포스트 교토의정서 체결과 관련,선진국이 탄소가스를 더 많이 감축해야 한다는 데도 의견을 같이 했다. 룰라 대통령은 브릭스의 상설 포럼화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릭스가 세계 질서의 새 축으로 급부상하고 있지만 인도와 중국 간 국경 분쟁이 계속되는 등 4개국 간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 글로벌 파워클럽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많다. 러시아 고등경제대학의 예브게니 야신 박사는 "브릭스가 영향력 있는 단일 조직체로 가기는 힘들며 비공식 클럽으로 남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은 이날 브릭스 정상회담에 앞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회원국들의 경제위기 극복을 돕기 위해 100억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