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세계 곡물 시장에서 주도권을 놓고 충돌했다. 러시아가 곡물 생산을 늘리기 위해 다른 수출국과 공조를 강화할 것을 제안하자 미국이 이를 카르텔이라며 견제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는 기아 퇴치라는 명분을 내세워 곡물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세계곡물포럼(WGF) 기조연설에서 "세계에서 5초마다 어린이 한 명이 죽어가고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10억명에 이른다"며 "세계 곡물 시장에서 투기로 인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밀 수출 세계 3위인 러시아는 이 자리에서 농업에 대한 투자를 늘려 향후 10~15년 내 곡물 생산을 50%,수출도 2배가량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첫 단계로 러시아는 옛 소련 국가 간 흑해 곡물 블록 창설을 주장했다. 옐레나 스크리니크 러시아 농업장관은 "우크라이나 및 카자흐스탄과 공동으로 곡물 재고를 조절하고 철도와 항구 수송능력을 개발하자"며 "흑해 연안의 곡물 수출국들과 협력하면 세계 곡물 시장의 변동성을 낮추고 투기적 수요의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 세계 단일 곡물재고 시스템을 만들자며 WGF 창설을 제안했다.

이 같은 러시아의 제안에 미국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미 농무부의 마이클 미치너 해외농업국장은 "러시아의 곡물 블록 형성 시도는 카르텔을 결성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치너 국장은 "이는 자유무역에 저해되는 것으로 신중할 것을 촉구한다"며 "그래도 강행한다면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악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인 미국이 각종 원자재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을 '곡물 시장 OPEC(석유수출국기구)'을 만들려는 것 아니냐며 견제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는 연내 WTO 가입을 추진해왔다.

러시아의 이 같은 움직임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세계은행의 클라우스 롤랜드 러시아 담당관은 "곡물 OPEC 구상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미온적"이라면서 "곡물 가격과 수급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농업화학 기업인 신젠타의 존 앳킨 최고운영책임자(COO)도 "세계 곡물 수요가 2030년까지 지금보다 50%,2050년까지는 두 배 증가할 것"이라면서 "수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포럼 참석자들도 정확한 재고 데이터를 만드는 데만 몇 년이 소요될 것이라며 설령 작업이 진행되더라도 전 세계가 아닌 지역 수준에 머물 것으로 내다봤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4일 올해 곡물 생산이 지난해보다 3% 줄어든 22억1900만t에 그칠 것이며 개도국의 식량 위기는 여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