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치 하락 한국에 도움… 불황 조기탈출 '신호탄'
새로운 기축통화 환상에 불과…달러 위상 변화 없을 것

"한국은 1930년대 대공황 당시 가장 먼저 위기를 탈출한 국가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 18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김인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한국경제학회장)와 가진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공황 당시 통화가치가 가장 많이 하락한 국가들이 가장 먼저 불황에서 벗어났다"며 "(최근 가치가 다소 상승하긴 했지만) 원화가치가 하락한 건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고,그런 면에서 한국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진단했다. 세계 경제에 대해선 "자유낙하(free fall)는 끝났다"면서도 "경기 침체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김 교수=한국은 2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습니다. 경제 체질도 1990년대 후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고요. 그런데 작년 하반기부터 원 · 달러 환율이 30%나 상승(원화가치 하락)하는 등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크루그먼 교수=한국이 타격을 입은 건 제조업 중심의 수출국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무역 규모가 대공황 때보다 더 큰 폭으로 줄었습니다. 세계 무역의 위축은 한국과 같은 수출국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원화가치도 하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화가치 하락은 한국에는 좋은 일 입니다. 수출경쟁력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한국은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불황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국가들은 역설적이게도 자국 통화가 가장 크게 하락한 국가들이었거든요. 당시 영국의 파운드화가 크게 하락하자 모두들 당황했지만 결국 영국에 좋은 일이 됐지 않았습니까.

▼김 교수=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 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했습니다. 이 같은 정책이 오히려 위기를 키웠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크루그먼 교수=동의하지 않습니다.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 성장한 국가들은 자본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비즈니스가 복잡해지고 무역이 많아지기 때문이죠.한국은 1990년대처럼 경제 체질이 약하지 않습니다. 자본 시장을 개방해도 경제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더이상 이머징(신흥) 국가가 아닙니다. GDP(국내총생산) 규모 등을 볼 때 선진국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김 교수=한국 정부는 글로벌 금융허브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번 금융위기로 금융허브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보십니까.

▼크루그먼 교수=이런 상황에서 금융허브가 되는 것은 꼭 즐거운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국 경제가 타격을 받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죠.금융 부문이 경제에서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지금 글로벌 금융허브를 얘기하는 것은 IT 버블 당시 모두다 IT에 달려들고 철강산업이 호황일 때 모두 제철소를 짓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김 교수=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미국의 재정적자와 세계 경제의 불균형이 현재 글로벌 금융위기의 배경이 됐다고 지적했는데요. 이 같은 불균형이 완화될 것으로 보시는지요.

▼크루그먼 교수=지금은 금융시스템의 혼란 때문에 미국 달러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사라지면 달러화 약세는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미국 적자규모도 당연히 줄어 들고요. 재정적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국제 통화질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달러화가 과거의 위상을 되찾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위상에 큰 변화가 오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김 교수=기축통화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까.

▼크루그먼 교수=그렇습니다.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개방된 자본시장을 갖고 있어야 하고 매우 유동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유로화조차도 달러화를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의 금융시장이 너무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죠.새로운 기축통화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김 교수=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대안정기(great moderation)'에 완만하고 안정적인 인플레이션이 낮은 금리환경을 조성하고 결국 미국 주택 가격의 거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이 통화정책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크루그먼 교수=그동안 중앙은행은 자산가격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얘기해 왔습니다. 거품이 붕괴되면 돈을 풀어 실물경제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이번 위기를 통해 거품이 너무 크면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는 중앙은행이 자산가격의 거품을 무시하는 정책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김 교수=이번 금융위기는 리먼브러더스와 같이 복잡하고 덩치가 큰 금융회사들의 실패가 전체 금융시스템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이 같은 금융회사들을 어떻게 규제해야 한다고 봅니까.

▼크루그먼 교수=굉장히 간단합니다. 예금 업무를 하는 전통적인 은행들을 1930년대부터 규제해 왔습니다. 뱅크런(예금인출사태)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면 경제가 악화될 수 있다는 걸 대공황에서 배웠기 때문이죠.이번엔 새로운 것을 배웠습니다. 리먼브러더스와 같은 회사들은 예금 업무를 하지 않지만 이들의 실패가 전통적인 은행들의 실패와 같은 효과를 낸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만약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구제할 필요가 있는 회사라면 평상시에 상업은행과 똑같이 규제해야 합니다. 레버리지에 제한을 둔다든가,자본 요건을 강화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김 교수=미국 경기가 바닥을 쳤다고 생각하십니까.

▼크루그먼 교수='자유낙하'(빠른 속도의 경기 침체)는 끝났다고 봅니다. 재고 현황을 보면 약간 호전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닥을 쳤다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안정화됐다는 게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겁니다. 경기가 회복된다는 징후는 아직 없습니다. '입원한 환자'가 아주 심각한 상태에서는 벗어났지만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같은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죠.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정리=유창재/이상은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