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그먼 '불황의 경제학' 출간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겸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이 세계 경제의 현재와 향후 행보를 진단한 책 '불황의 경제학'(세종서적 펴냄)이 출간됐다.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를 목도한 뒤 '현대 의학에 의해 박멸된 줄 알았던 치명적인 병원균이 기존의 모든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형태로 재출현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그는 '잠복기'에 들어갔던 병원균이 다시 살아나 "이제 전염병이 전 세계를 덮치고 있다"고 진단하며 다시 '불황경제학'에 주목한다.

크루그먼은 "이번 위기가 과거에 목격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쩌면 이전에 목격한 모든 위기들과 똑같다고, 아니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며 1990년대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현재 진행 중인 글로벌 금융위기의 리허설이었을뿐이라고 주장한다.

1997~1998년 금융위기를 겪었던 각국 정부는 위기가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해외자금 철수에 취약해지지 않으려 해외차입을 피했고 비상시에 대비해 막대한 달러와 유로를 비축했다.

하지만, 금융세계화의 부상으로 신흥시장들은 '캐리 트레이드'라는 특별한 취약점에 노출됐다.

일본처럼 저금리국가에서 돈을 빌려 러시아나 브라질 같은 고금리 국가에 대출하는 캐리 트레이드는 이번 세계 금융시장 패닉에서 가장 큰 피해를 봤다.

일본을 비롯한 저금리 국가들로부터 자금줄이 끊기면서 엔화 가치가 폭등했고 신흥시장으로 더는 자본이 흘러들어오지 않자 신흥시장 통화는 폭락했다.

신흥시장 정부는 충분히 대비를 했지만 리스크를 신경쓰지 않고 해외차입에 열중한 은행과 기업 때문에 정부의 노력은 수포가 됐다.

크루그먼은 이번 금융위기에서 목격된 이러한 국제 통화 시장의 혼란은 바로 1997년 인도네시아와 2002년 아르헨티나의 위기에서 볼 수 있었던 현상과 매우 흡사했고 차이가 있다면 이번 위기가 규모 면에서 훨씬 컸다라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똑같은 전염병의 '재발'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크루그먼은 "현재의 위기 규모가 크긴 하지만 세계 경제는 십중팔구 공황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불황은 계속되리라는 전제 아래 불황경제학에서 해법을 찾는다.

그는 위기를 불러온 경제적 취약점들을 개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발등의 불을 끄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며 전 세계 정책입안자들에게 신용경색 완화와 소비 지원을 주장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며 일시적으로는 사실상 금융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완전한 국유화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스템 구제로 신용시장이 살아난다고 해도 세계적인 불황은 여전히 그 여세를 몰아갈 것이며 이때는 케인스식의 오래된 경기부양정책이 해답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크루그먼은 "공황 자체는 재현되지 않겠지만 불황경제학이 놀라운 컴백을 했다"며 "나는 우리가 불황경제학의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공황을 제대로 이해한 경제학자인 케인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1999년 출간된 '불황경제학'의 수정증보판으로 원서는 지난 2월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됐다.

출판사 측은 "최근 세계 경제 위기 상황을 반영해 절반 이상의 내용을 새로 쓴 사실상의 신작"이라고 설명했다.

원제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 안진환 옮김. 240쪽. 1만4천원.

'불황경제학' 외에 국내에 1997년 출간됐던 '팝 인터내셔널리즘'도 '폴 크루그먼 경제학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황금사자 출판사를 통해 다시 출간됐다.

'폴 크루그먼 경제학의 진실'은 크루그먼이 '포린 어페어스'를 비롯한 학술지에 발표한 글 13개를 모은 책으로 1994년 포린 어페어스 11.12월호에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을 '종이호랑이'라고 평가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글 '아시아 기적의 신화' 등이 수록됐다.

김광전 옮김. 284쪽. 1만4천원.

한편 크루그먼은 17~18일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리는 '세계금융컨퍼런스'에 참석해 '신용위기와 세계경제: 교훈과 세계 금융시장의 재건'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zitron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