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과정에서 한국경제의 가장 큰 애로는 유능한 기업가가 크게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누가 유능한 기업가인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부는 유망한 기업가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성과주의에 의한 선별적인 기업지원 정책을 일관성 있게 지켰다.

그런데 조속한 산업화를 위해 시급히 건설해야 할 현대적 제조업의 숫자는 유능하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확인된 기업가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은 이들 소수의 기업가들에게 수많은 현대적 제조업체를 설립해 경영하도록 위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최고의 부자였던 사람들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수십 개의 기업을 창업할 개인적 재력은 갖추지 못했다. 대체로 먼저 창업된 기업이 출자해 새로운 기업들을 창업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활용되었다.

재벌총수가 먼저 창업된 기업을 지배하고 이 기업이 새롭게 창업된 기업을 지배하는 형태의 피라미드형 소유구조가 등장한 것이다. 오늘날 재벌체제의 순환출자 소유구조는 이러한 단순 피라미드형 구조가 진화한 결과다.

유능한 기업가가 태부족한 개발도상국이 외국인 직접투자를 어느 수준 이하로 통제한 상황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려면 이들 소수 기업가에게 많은 사업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꺼번에 많은 사업체의 지배적 주식지분을 개인 돈만으로 출자할 재력을 갖춘 기업가는 없다.

재벌그룹의 소유구조는 이러한 여건에서 유능한 기업가가 설립 지배할 수 있는 기업 숫자를 최대한 늘리는 데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한국 기업부문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재벌체제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데 핵심적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 ·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부작용을 동시에 일으켰다. 이 때문에 재벌체제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경제력 집중' '무분별한 문어발식 확장' 그리고 '선단식 황제경영' 등 재벌체제의 문제를 공격하는 용어들은 선정적이기까지 하다. 개방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재벌이라는 단어 앞에는 반드시 독과점이라는 접두사가 붙어 '독과점 재벌'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재벌체제는 개발시대 정부의 선별기업 집중지원정책의 산물이다. 정부의 많은 특혜가 이들 선발된 기업가에게 제공되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날 재벌체제의 성공은 그 총수의 공로이기 이전에 전 국민적 희생이 뒷받침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주장하는 사회 일각의 목소리는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성공한 재벌체제는 동시에 직간접적으로 국민들에게 수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편리한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자가용 승용차를 굴리는 요즈음의 생활은 1960~70년대에는 어느 누구도 꿈조차 꿀 수 없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재계는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민적 희생에 이미 보답한 셈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