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무책임한 타협으로 실효성 없는 법안이 양산되고 있다. 특히 여당의 무기력한 국회 운영으로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완화를 원점에서 다시 논의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금산분리 완화는 기업이 은행에 투자를 더 할 수 있도록 길을 넓혀주기 위한 것으로 이명박 정부가 경제 활성화의 상징으로 내세운 정책이다.

여야는 4월 마지막 날 임시국회에서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4%에서 9%로 늘린 은행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으나 정작 은행지주회사에 대한 지분 보유 한도를 9%로 늘린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여당 내부의 반대로 부결시켰다.

이에 따라 산업자본이 개별 은행에 대해서는 9%까지 지분을 가질 수 있지만 은행지주회사는 지금처럼 4%로 제한받는다. 국민 우리 신한 하나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의 지분을 지주회사가 100% 소유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전혀 실효성 없는 법안이 탄생한 셈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는 한 산업자본이 은행 지분을 늘릴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금산분리 완화를 위해서는 6월 임시국회에서 상임위부터 논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여당 내부의 반란으로 부결됐다는 점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산업은행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않고 정책금융공사법만 통과시켜 산은 민영화 법안을 무력화하더니 이번에는 금산분리 완화 법안을 반쪽짜리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은 "금산분리 법안을 불구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은행법 개정안 시행 전까지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법 개정안이 원칙 없는 여야의 정치적 타협으로 통과되면서 기형적인 '9%'가 탄생한 점도 논란이다. 당초 은행법 개정안은 산업 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4%에서 10%로,사모펀드의 출자 한도를 10%에서 20%로 각각 높이는 것으로 2월 임시국회에서 정무위를 통과했으나 법사위 반대에 부딪쳐 본회의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

4월 임시국회로 넘어온 은행법은 이번에도 법사위의 벽에 부딪쳐 본회의 상정이 가로막히다 회기 마지막 날인 지난달 30일 오후 9시 이후에 10%를 9%로,20%를 18%로 깎는 선에서 여야가 절충점을 찾아 가까스로 본회의 통과를 마쳤다.

현행 4%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은행 지분 제한 조정을 국회에서 논의한 2002년 당시 여야는 5%와 10%를 놓고 협상을 벌이다 절반인 7.5%로 타협한 뒤 이를 반올림해 8%로 하자고 잠정 합의했으나 최종 협상 과정에서 절반이 깎이면서 4%가 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정부 관계자는 "산업 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9%로 정한 은행법 개정안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어떤 합리성도 찾을 수 없다"며 "그야말로 아무런 법적 근거나 정통성도 없는 누더기 법안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은 경제 위기를 맞아 은행 자본 확충을 위해 최근 산업 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15%로 높였고 유럽의 경우 획일적인 지분 규제를 하지 않고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통해 산업 자본의 은행 보유를 선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