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정몽구 현대 · 기아자동차 회장,구본무 LG 회장,최태원 SK 회장,정준양 포스코 회장,허창수 GS 회장 등 주요 기업 총수들의 움직임이 한층 분주해졌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총수들이 직접 현장을 찾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는 것.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계열사 임직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총수들의 보폭이 넓어졌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총수들이 공식 석상에서 새로운 성장동력과 관련된 비전이나 지침을 제시하는 사례도 잦아졌다. 향후 어디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지와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동시에 눈앞의 실적에 연연해 긴 호흡을 잃으면 곤란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다.

정몽구 회장은 '글로벌 현장경영'에 힘쓰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유럽을 찾아 독일 유럽총괄법인,현대차 체코공장,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 등을 둘러봤다. 정 회장이 해외 현장을 찾은 것은 작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의 러시아 정상 외교에 동행한 이후 5개월 만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정 회장이 현지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유럽 공장의 설비 가동 상태와 양산 차량의 품질을 직접 점검했다"며 "현지 임원들에게 올해 초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글로벌 판매 확대를 통한 수익 확보'와 관련한 설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안전모를 쓴 정 회장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가장 자주 찾는 곳은 충남 당진 일관 제철소 건설현장이다. 일관 제철소는 현대 · 기아차 그룹의 대표적인 미래 성장 동력이다. 현대제철은 내년 4월 가동을 목표로 5조8400억원을 투입해 일관 제철소를 건설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은 'R&D(연구개발) 드라이브'를 통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민첩한 추격자'에서 '글로벌 마켓 리더'로 변신한다는 전략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최근 LG전자 서초 R&D캠퍼스 준공식과 LG 연구개발 성과보고회에 잇따라 참석해 "원천기술 확보를 통해 미래 흐름을 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회장은 "경제위기 속 지속 가능한 성장 해법은 LG만의 독창성에 기반해 차별화된 고객 가치를 만들어 내는 힘이며,그 중심에 바로 R&D가 있다"면서 "특히 미래 흐름을 선도할 수 있는 원천기술 확보에는 아무리 긴 시일이 소요되더라도 더욱 적극적으로 도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구 회장은 집중과 선택 전략을 통해 R&D 효과를 극대화할 것도 주문했다. 전자,화학,통신 등 기존의 세 주력 사업을 글로벌 1위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태양전지,LED(발광다이오드),하이브리드카용 전지 등 친환경 신사업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3+1 전략'을 통해 다수의 글로벌 1위 아이템을 만든다는 게 구 회장의 로드맵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키워드는 '생존'과 '소통'이다.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강조한 후 현장의 목소리들을 수렴,세부적인 경영 계획을 만들겠다는 뜻이라는 게 SK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생존'과 관련된 발언이 처음 나온 것은 지난 1월이다. 그는 임직원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현재 상황을 위기나 불황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위기가 아니라 생존조차 담보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며 "현실을 직시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SK도 미래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최근 SK텔레콤 마케팅본부와 SK브로드밴드,TU미디어,SK텔링크 등 정보기술(IT) 관계사들이 입주한 남산 그린빌딩을 포함해 워커힐호텔,SK네트웍스,SK증권 등 6개 계열사 사업장을 차례로 찾았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공감대를 마련하고 그룹 내 임직원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그는 현장 방문 자리에서 "불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임직원들이 한마음 한뜻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 들어 포스코의 새로운 사령탑이 된 정준양 회장은 지난달 31일 포항 본사에서 열린 창립 41주년 기념식에서 '업(業)''장(場)''동(動)'이라는 화두를 제시했다. 포스코의 사명을 생각하는 동시에 넓은 시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 빨리 움직이자는 의미도 담겨 있다.

정 회장은 취임 직후 '불경기 이후 도약'을 위해 공격적인 경영을 하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그는 지난 2월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적극적인 M&A(인수 · 합병)를 통해 사업을 확장하는 브라운 필드(brown field) 투자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M&A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브라운 필드 투자'는 새로 공장을 짓는 '그린 필드 투자'와 기업을 통째로 사들이는 'M&A'의 중간 성격을 띤 투자 방식이다. 설비가 낙후된 중 · 소형 제철소를 인수해 여기에 고로를 다시 얹고 생산 시설을 개선하는 것이 브라운 필드 투자의 한 예다.

환경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는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그는 "친환경 설비를 구축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산화탄소 저감 기술 자체가 새로운 먹을 거리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허창수 GS 회장의 지론은 '여건이 어려울수록 현장에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월 그룹 경영진 신년 모임에서도 "어려운 문제일수록 실패의 원인은 잘못된 방법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었다.

허 회장의 현장 경영은 독특하다. 현장 구석구석을 돌며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최근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있는 복합쇼핑몰 GS스퀘어를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하 2층 식품매장부터 2층 쇼핑몰,문화센터까지 전 매장을 둘러본 후 판매 직원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직원들에게 "경기 침체기에는 단순한 고객만족을 넘어 잠재된 고객의 요구를 이끌어내고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조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며 "차별화된 서비스를 통해 고객과의 소통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주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