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공이 20개 들어 있는 주머니에서 무작위로 공을 꺼내 들었다. 무슨 색일까. 상식적인 답은 '검은색'이다. 진화론자들은 다른 대답을 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흰색일 수 있다. "

찰스 다윈은 1858년 영국 린니언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진화의 전제조건 중 하나로 '변이'를 들었다. 형질이 동일한 개체들 간에는 빈번한 선택이 벌어진다 해도 유의미한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변이로 인한 변종의 출현 자체를 진화로 볼 수는 없다. 바뀐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변이가 선택되고 그렇지 못한 변이는 도태되는 자연선택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변종은 취객의 걸음걸이와 닮았다. 특별히 미리 정해둔 방향성이 없다는 얘기다.

검은 공이 흰색으로 바뀔지,붉은 색으로 변할지는 다분히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진화는 '눈먼 시계공'일 뿐이다.




# 업계를 뒤흔든 변종들

기업 세계에서도 진화의 룰은 바뀌지 않는다. 진화를 이끄는 것은 언제나 변종이다. 국내 교육업계는 변종이 우글거리는 정글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대입 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데다 유망 직업의 변화,경기의 부침 등과 같은 다양한 변수들이 수많은 변종의 탄생을 부추긴다.

시가총액이 1조4000억원에 달하는 교육 공룡 메가스터디는 한 사회탐구 강사의 엉뚱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창업주 손주은 사장은 2000년 인터넷의 출현으로 등장한 온라인 교육의 강점이 '무한복제'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메가스터디를 만들었다. 오프라인 학원은 한 강의실 수용인원이 많아야 2000명 수준이지만 온라인으로 이를 옮겨오면 10만명에게 판매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인터넷을 교육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업체는 메가스터디만이 아니었다. 배움닷컴,참누리,J&J 등도 엇비슷한 사업 모델을 들고 나왔다. 메가스터디는 서울 대치동의 강사들을 대거 영입해 '스타강사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으로 경쟁사를 따돌렸다. 스타강사에게 자신이 참여한 강의로 인한 매출의 30%를 주는 이 시스템은 지금까지도 후발주자를 견제하는 진입장벽 역할을 하고 있다. 1위 업체에 가야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 우수 강사들이 메가스터디에만 몰리기 때문이다.

메가스터디 이외의 메이저 교육업체들도 스스로 변종이 되는 결단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학습지 업계 1위인 대교는 학생들이 교사를 찾아가야 하는 학원 사업의 불문율을 무너뜨리고 연간 3조원 규모에 달하는 학습지 시장을 개척했다.

제조업의 강자 중에도 눈에 띄는 변종이 많다. 정수기 업계 1위인 웅진코웨이는 외환위기로 급감한 정수기 매출을 회복하기 위해 한 달에 2만원씩 받고 제품을 빌려주는 사업 모델을 개발,업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1999년 걸레질이 가능한 스팀청소기라는 독특한 상품을 만들어 대기업이 즐비한 전자업계에서 입지를 다진 한경희생활과학도 변종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 중 하나다.

# 변종이 변종을 잡아먹는다

자연선택을 받은 변종은 어떤 운명을 걷게 될까. 역사가 긴 자동차 산업을 보면 새로운 변종이 지속적으로 변이를 일으키지 못해 주류로 변해버린 변종을 잡아먹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구제금융 없이는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 미국 포드사도 처음에는 변종이었다. 헨리 포드는 1909년 대량생산을 통해 가격을 낮춘 모델 T를 개발,자동차 업계를 석권했다. 당시 모델 T의 출시 가격은 850달러로 2000달러를 웃돌았던 기존 제품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한 세대를 풍미했던 포드는 1920년대 들어 새로운 변종 GM에 왕좌를 내주게 된다. GM은 캐딜락,뷰익,올즈모빌,폰티악,시보레 등 가격대가 서로 다른 5종의 신차를 한꺼번에 내놓으며 처음으로 다품종 생산 시대를 열었다. 모델 T에 식상함을 느낀 소비자들은 급속히 GM으로 이동했다. 결국 포드는 1927년 1월 모델 T 생산을 중단하게 된다.

자동차 왕국인 미국은 1970년대 들어 도요타를 필두로 한 일본 업체들에 주도권을 내주기 시작한다. 1970년 미국에서 배기가스 규제를 강화한 머스키 법안이 통과하면서 연비가 뛰어난 일본차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설상가상으로 1973년과 1979년에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소형차 시장은 고스란히 일본 업체들의 수중으로 떨어지게 됐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