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의 모태인 선경직물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 자본이 세운 회사였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은 회사를 버리고 도망쳤고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공장은 폐허가 됐다. 숨통이 거의 끊겨 가던 선경직물을 살려낸 건 1944년 견습기사로 입사한 20대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폭격으로 못쓰게 된 직기들을 하나하나 수리해 공장을 재건했다. 이 청년이 바로 SK그룹 창업주인 고(故) 최종건 회장이다.

어쩌면 SK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이때부터 '기업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숙명을 되새겨 왔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종의 다양성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시카고대를 나온 고 최종현 회장(최종건 회장의 동생)은 이 같은 비즈니스의 역동성을 일찍 깨우치고 있었다. 최종건 회장이 별세한 후 그룹의 중장기 비전을 '섬유에서 석유까지',즉 수직계열화로 잡은 것도 이런 믿음에서였다.

# 실패는 진화의 어머니

그의 꿈은 원유정제와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하는 것.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선경은 1973년 일본 이토추,데이진과 함께 국내에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하지만 중동전 반발로 무산됐다. 1975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플라스틱 공장 건설에 투자하려다 또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반복됐지만 그 사이에도 '퀀텀 점프'를 위한 작은 진화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최종현 회장의 석유외교가 대표적이다. 그는 중동 유력인사들과의 접촉을 계속 확대했다. 마침내 1977년 일개 기업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의 초청을 받고 "훗날 최 회장이 정유사업을 하면 상당량의 원유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퀀텀 점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국 걸프사가 유공의 지분 50%를 팔고 철수하자 민영화를 추진하던 정부는 인수의 첫번째 조건으로 '원유의 장기적,안정적 확보 능력'을 걸었다. 선경은 유공 인수자 결정을 앞둔 1980년 사우디 국영석유광물공사와 장기 원유공급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결국 당시 유일하게 매출 1조원을 돌파했던 거대기업 유공은 선경의 손으로 넘어간다.

# 두번의 좌절 그러나…

다양성을 향한 SK의 진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최종현 회장은 수직계열화가 가시화되던 1980년 초반부터 정보통신산업 진출을 새로운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1992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던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손에 거머쥐웠다.

선경은 수만장짜리 계획서를 만들며 총력을 기울였지만 환경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친인척 기업으로 특혜를 받았다는 여론만 들끓었다. 결국 손길승 당시 대한텔레콤 사장은 사업권 반납을 발표해야 했다.

이후 김영삼 정권은 다시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 나선다. 하지만 이번에도 호락호락한 환경은 아니었다. 컨소시엄 구성을 일임받은 전경련 회장이 최종현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특혜 시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한 최종현 회장은 다른 승부수를 건다. 제2이동통신사업권은 포스코와 코오롱에 넘기고 선경은 정부가 민영화를 추진하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것.'꿩 대신 닭을 선택했다'는 게 당시 언론들의 평가였지만 한국이동통신은 훗날 SK 그룹의 '황금 거위'가 됐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