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지난해부터 전사적 '긴급 가치분석(value analysis)'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설계를 바꿔 부품 수를 줄이는 게 핵심이다. 값싼 소재를 발굴하고 부품 외부 발주량도 늘려 불황과 엔고(円高)의 이중고를 넘자는 운동이다.

과거와 달리 이번엔 신차뿐 아니라 기존 양산 모델도 원가 절감 대상으로 삼았다. 부품업체들로부터 6000여건의 원가 절감 제안을 받아 올초부터 순차적으로 실행해 나가고 있다. 국내외 사업장에선 정규직을 포함해 7000명을 감원키로 했다.

반면 현대 · 기아자동차 등 국내 완성차 업계는 강성 노조에 발목이 잡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해외 생산 차종 결정도 노조 눈치만 보고 있다. 환율효과와 소형차 선전 등에 힘입어 그나마 충격을 덜 받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일본은 위기에 당면한 기업 스스로,중국은 중앙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토대로 엄청난 체질 개선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며 "경쟁력을 높이지 못한 채 원화의 '나홀로 약세'가 사라지면 한국 기업들은 과거보다 더 심각한 샌드위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걱정했다.

도요타는 1985~1988년,1993~1995년,1999~2000년 등 모두 세 차례 엔고 위기를 경험했지만 이를 경쟁력 업그레이드의 기회로 바꿨다.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달러당 230엔에서 120엔으로 급등한 1차 위기 때 도요타는 원가를 절반으로 줄이는 '챌린지 50 운동'을 통해 새롭게 무장했다. 2차 엔고 시기엔 플랫폼 통합을 통해 비용을 절감,3년 만에 이익을 2.7배 늘렸다. 3차 엔고 때는 글로벌 생산체제를 구축해 자동차 최강자로 도약했다.

도요타,혼다,닛산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지난해 4분기 이후 감산과 감원,원가 절감 등을 통해 현금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하이브리드카,전기자동차 등 보급형 친환경차에 대한 투자도 늘리고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에 투자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켜 온 일본 기업 특유의 근성이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도요타는 내년까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서 모두 23개 하이브리드카를 추가 출시하기로 했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혼다 역시 작년 말 세계 최고 자동차레이스 'F1(포뮬라1)'에서 철수,F1 레이싱카 개발인력 400명을 친환경차 분야로 전환 배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일본 업체들의 하이브리드카 경쟁은 가격파괴 경쟁으로 치달을 조짐이다. 혼다가 올초 하이브리드카 전용모델 인사이트를 189만엔(약 2600만원,기본 모델 기준)에 내놓으면서 돌풍을 일으키자 도요타는 인사이트와 경쟁할 수 있는 소형 하이브리드카를 2011년 출시키로 했다. 1.3ℓ급 소형차인 야리스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장착할 계획이다. 이 경우 차값은 대당 170만엔(약 2300만원)까지 떨어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기계산업팀장은 "엔화가 약세로 돌아설 경우 일본 하이브리드카는 한국 업체들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동차뿐 아니다. 엔화 강세로 고전하고 있는 일본 전자 및 철강업체들도 체질 강화에 나섰다. 신일본제철 등 일본 5대 철강회사는 이토추상사 등과 함께 브라질 철강회사 '나미자' 지분 40%를 사들였다.

전자업체들도 발빠르게 움직인다. 신흥시장을 겨냥한 저가 제품을 앞세워 본격적인 한국 견제에 나설 태세다. 후지필름은 기능을 단순화해 대당 가격을 100달러 이하로 낮춘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올해 중 아시아와 남미 시장에 내놓기로 했다.

파나소닉은 저가형 가전제품을 작년보다 40% 늘려 올해 중 신흥시장에 팔 계획이다. 이 회사는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순손실이 3800억엔(약 5조7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파나소닉의 실적이 나빠 보이는 것은 올해 추진할 구조조정 비용을 미리 반영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파나소닉은 막대한 순손실을 기록했지만 한국보다 환율이 50% 불리한 상황에서도 영업이익 플러스를 유지했다"며 "환율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 이 회사 경쟁력은 우리와 게임이 안될 정도로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TV 업계는 '삼성 천하'라는 말이 나올 만큼 삼성전자가 소니를 압도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4분기 세계 평판 TV(LCD와 PDP TV 포함) 시장 점유율(매출 기준)은 21.9%.2위 소니와의 격차가 8.8%포인트에 달했다. 점유율 차이가 매년 벌어지고 있음에도 삼성전자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세계 시장 소비자들에게 가장 먼저 생각나는 TV 브랜드를 물어보면 여전히 '소니'라는 답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부문에서도 엘피다,도시바 등 일본 업체들은 경계 대상이다. 엘피다는 D램 부문 3위,도시바는 낸드플래시 부문 2위로 두 분야 1위를 달리고 있는 삼성전자와 막바지 대결을 벌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엘피다에 보조금을 주고 엘피다가 군소 대만 업체 중 한두 곳을 인수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중국 기업들 역시 글로벌 주요 시장에서 새 경쟁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대표적 전자업체인 하이얼은 한국과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장루이민 하이얼 회장은 제조기업에서 마케팅 기업으로 정체성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중국 정부는 디이 · 둥펑 · 상하이 · 창안 · 지리자동차 등 선도업체를 중심으로 자동차산업을 통 · 폐합,연 생산능력 200만대 규모의 대형 업체 2~3개를 전략적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지리차는 포드로부터 볼보 인수를 추진하고 있어 글로벌 주류 업체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철강산업에 대해서도 바오산 · 안번 · 우한강철 등 선도업체의 연간 조강(쇳물) 생산량을 2011년까지 5000만t 이상으로 확대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매머드급 중국 철강회사들이 탄생하면 세계 철강시장의 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구본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국내 기업들은 고환율에 편승한 수출제품의 가격 인하보다는 품질관리와 납기 준수를 통해 글로벌 고객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열/송형석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