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에 밉보여 재계 7위 그룹이 한순간에 해체되는 비운을 맛봤던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29일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양 전 회장은 노환과 폐렴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양 전 회장은 1940년대 고무신 공장에서 시작한 국제그룹을 1980년대 재계 서열 7위까지 올려 놓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렇지만 전두환 정권 때 하루아침에 그룹이 해체당하는 시련을 겪어 '비운의 기업인'으로 불려왔다.

양 전 회장은 부산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9년 부산진시장에 국제그룹의 모태가 된 국제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왕자표 고무신'을 베스트셀러로 키운 여세를 몰아 1963년에는 신발류 및 비닐제품 생산업체 진양화학을 세웠다.

1962년에는 국내 최초로 신발을 미국에 수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후 1970년대 수출붐을 타고 성장을 거듭하면서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국제상선,신동제지,동해투자금융 등을 설립했다. 동서증권,동우산업,조광무역,국제토건,국제종합엔지니어링,원풍산업 등을 인수하며 대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1980년대 중반 국제그룹은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1985년 2월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이 발표한 '국제그룹 정상화 방안'에 따라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나머지 계열사와 국제그룹 사옥은 한일그룹에 넘어갔다.

무리한 기업 확장과 과도한 단기 자금 의존및 해외 공사 부실 등이 그룹 해체의 표면적인 이유였지만,당시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부실기업 정리'라는 미명 아래 희생됐다는 분석이 업계에서는 정설로 돼 있다. 양 전 회장이 정치자금 헌납을 거부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 늦게 나타나거나 1985년 총선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괘씸죄'에 걸렸고,결국 그룹 해체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후 양 전 회장은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소송을 벌여 1993년 승소판결을 얻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1994년 한일합섬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 인도 청구소송에서 패소하고,외환위기를 거치며 국제상사와 국제그룹 빌딩 등을 가져간 한일그룹도 해체되는 바람에 그룹 재건은 실패했다. 이후 뚜렷한 대외 활동 없이 칩거해 왔다.

양규모 KPX 회장,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이 양 전 회장의 동생이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양희원 ICC대표와 사위인 권영수 LG디스플레이 대표이사,이현엽 충남대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안실 20호에 마련됐다(☎ 02-3010-2631).발인은 4월1일 오전 9시.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