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터키 최대 가전유통업체인 테크노사(TechnoSa)의 이스탄불 이즈미예 파크 매장.삼성,LG의 LCD TV가 깔려 있는 매장 한쪽에 일본 샤프의 LCD TV를 선전하는 광고 전단지가 놓여 있었다. TV박스 겉면에 선명하게 박힌 커다란 일장기와 'Made in Japan'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샤프'라는 브랜드는 조그만 글씨로 적혀 있어 자세히 들여다봐야 볼 수 있었다.

지난 2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현대자동차 유럽 총괄 법인을 찾은 기자에게 오영근 법인장(전무)은 "생존의 기로에서 살아돌아온 느낌"이라고 했다. 2월 판매 실적을 집계해보니 자동차업체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달성한 것.현대 · 기아차의 유럽 시장 점유율은 4.3%로 아시아지역 브랜드 중에서 가장 높은 도요타의 5.6%에 바짝 다가섰다.

전통적으로 제조업이 강한 유럽은 한동안 한국 기업들이 넘기 쉽지 않은 '강자'의 벽이 많았다. 핀란드 노키아는 유럽은 물론 세계 휴대폰시장에서 부동의 최강자로 군림해 왔다. 수십년 앞서 진출한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업체와 달리 현대 · 기아차는 유럽에선 후발주자다. 삼성과 LG전자마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마케팅을 해왔다.

글로벌 불황 한파 속에서 발현된 한국 기업들의 위기관리 DNA(유전인자)가 유럽 시장에서도 시장질서를 뒤바꿔놓고 있다. 휴대폰,TV,자동차 등 3두 마차를 필두로 한국의 주력 산업군은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풍력,태양열 발전 등 신 · 재생 에너지 분야에서도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유럽 기업들이 한국 부품업체에 '러브콜'을 보낸다.

불황으로 주춤하고 있지만 호황으로 돌아서면 한국의 대(對)유럽 수출이 600억달러 고지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한국의 유럽 수출액은 2007년 559억달러에서 지난해 583억달러로 늘었다. 거의 타결된 한 · EU 자유무역협정이 정식 체결되면 한국 기업들의 입지는 더 커진다.

삼성,LG전자는 유럽 휴대폰 시장에서 노키아 아성(牙城)을 위협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GfK 집계에 따르면 삼성은 지난 1월 서유럽 휴대폰 시장에서 24.6%의 점유율을 나타냈다.

노키아는 34.8%로 1위를 지켰지만 1700명 감원 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전 직원 무급휴가를 실시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1년 전보다 점유율을 5.3%포인트 끌어올린 반면 노키아의 점유율은 3.9%포인트 떨어졌다. LG전자 점유율도 1년 만에 2.5%포인트 상승했다.

삼성전자는 서유럽 대표 시장인 영국(26.8%)과 프랑스(29.6%)에서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영국 점유율은 1년 만에 7.5%포인트나 뛰었다. LCD TV는 이미 삼성과 LG전자가 유럽 전체 시장 1위를 석권했다.

손병옥 LG전자 터키 생산법인장은 "우리쪽 영업맨들이 '이 정도면 가격 경쟁력은 충분하다. 장전은 충분히 했고,어디를 향해 총을 쏠지만 결정하면 된다'고 얘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현대 · 기아차의 선전은 '드라마틱'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30여년 먼저 유럽에 진출한 도요타와의 격차를 1% 포인트대로 좁히며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닛산,혼다,스즈키,마쓰다 등이 모두 현대차의 뒤편으로 밀렸다.

지난 2월 유럽 자동차 시장은 작년 같은 달에 비해 17.3% 쪼그라들었다. 폭스바겐,푸조의 PSA그룹,포드,피아트,GM,르노,도요타,BMW 등 쟁쟁한 글로벌 기업들이 판매 부진의 직격탄을 맞았다. 그런 와중에서 현대차만 유일하게 20.2% 판매가 늘었다.

조래수 현대차 프랑크푸르트법인 마케팅부장은 "i30 등 유럽 스타일에 맞춘 중 · 소형차 중심으로 마케팅을 펼친 전략이 주효했다"며 "유럽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도요타 등 일본 기업의 자만심도 한국 기업의 약진을 거들었다"고 설명했다. 프랑크푸르트 현대차 직영점에서 만난 다미르 뮐러씨(58)는 "대학을 졸업한 아들에게 차를 사주려고 왔다"며 "폭스바겐,도요타를 먼저 보고 왔는데 아들이 i30 디자인을 가장 마음에 들어한다"고 전했다.

유럽의 신 · 재생 에너지 분야에서도 길이 넓어지고 있다. 2005년 세계 1위 풍력 발전기 제조업체인 덴마크 베스타스와 첫 거래를 시작한 태웅은 지난해 4억달러 규모의 장기 공급 계약을 맺은 데 힘입어 기존 1위였던 스페인 포야스를 제쳤다. 2005년만 해도 포야스의 점유율은 50%에 달했으나 태웅에 밀려 지난달 현재 20%대로 떨어졌다.

태웅 관계자는 "세계 풍력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베스타스,GE,지멘스 등 3개사에 주요 설비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며 "이들 업체가 공급 만기가 오기도 전에 추가 물량 확보와 계약 연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러브콜을 보내올 정도"라고 말했다.

일본의 기술력과 중국의 가격에 밀렸던 태양광 발전 분야에서도 한국산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친환경바람 속에서 2006년 설립된 프랑스 태양광 업체 키너지(Kinergy)사는 이달부터 한국산 태양광 모듈을 들여다 쓰고 있다.

1차 수입액은 10만유로지만 같은 품질의 유럽 제품에 견줘 10~15% 싼 한국산 도입을 늘려 나갈 생각이다. 현지 품질인증을 획득해 제품의 안전성과 신뢰성이 확인된 데다 가격경쟁력까지 갖추고 있는 점을 감안한 결정이다.

프랑크푸르트 · 이스탄불=박동휘/안정락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