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의 질주②] 도요타ㆍ소니 "1엔 이라도 싸면 한국산 부품 써라"
지난 1월 초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KOTRA 무역관.미쓰비시전기의 구매담당자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가전제품을 포장하는 종이 상자를 만드는 한국 회사를 소개해달라." 원가 절감을 위해 그동안 일본 내에서만 조달하던 상자를 한국에서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KOTRA는 미쓰비시전기 담당자와의 협의 과정에서 한국 부품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다는 점을 파악하고 적극적인 마케팅에 들어갔다. 그 결과 미쓰비시전기는 상자 외에도 볼트 너트 고무패킹 절연재 등을 한국에서 조달하기로 하고 25일 담당자가 구매상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키로 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의 부품시장이 한국 기업에 조금씩 문을 열고 있다. 지금까지는 발이 닳도록 찾아가 부품 설명서 등을 돌려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일본 기업들이 지금은 제 발로 찾아오고 있다.

한국산 가격이 싸기 때문만은 아니다. 싼 걸로 치면 중국산이 있다. 그러나 중국 부품은 신뢰도가 낮아 한국 부품 기업을 찾는 일본 기업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중국산보다 품질이 우수하고,일본산에 비해선 저렴한 '역(逆)샌드위치 효과'가 부품 · 소재 분야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는 1월부터 포스코에서 자동차 내부용 도금강판을 납품받기 시작했다. 포스코는 그동안 일본의 다른 자동차 업체엔 강판을 팔았지만 도요타 현지공장에는 공급하지 못했다. 일본 자동차 회사 중에서도 특히 품질 기준이 높은 도요타는 신일본제철 강판만 고집했다.

도요타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4500억엔(약 6조75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최종 손실 전망.이 회사는 2차 세계대전 후 최악의 경영실적 때문에 최근 공장 화장실 휴지를 아낄 정도로 원가 절감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마당에 신일철 강판보다 5% 안팎 싼 포스코 강판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도요타뿐만이 아니다. 소니와 샤프는 '가급적 한국 부품 조달을 늘리라'는 지침을 최근 부품 구매부서에 통보했다. 핵심 부품이 아닌 범용 부품은 몇 엔이라도 싸면 한국산을 쓰라는 지시였다.

LG재팬 관계자는 "샤프의 경우 LCD TV에 들어가는 편광확산필름 등 화학제품의 구매 의사를 밝혀 왔다"며 "작년까지는 우리쪽에서 매달려도 안 됐는데 스스로 태도를 바꿨다"고 말했다.

소니는 TV 등에 들어가는 표면처리강판 2만t 정도를 포스코에서 구입할 예정이다. 포스코가 소니에 강판을 판매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최대 가전 메이커인 파나소닉(옛 마쓰시타전기)도 그동안 일본에서만 조달하던 LCD 패널용 백라이트와 시트 등 부품을 LG이노텍과 LG화학 등에서 구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삼성재팬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부품 조달에 자국 업체를 최우선시했지만 엔고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글로벌 소싱을 확대하고 있다"며 "그 가장 큰 수혜를 한국 기업들이 입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기업들과 KOTRA는 일본 부품 · 소재 시장에서의 역샌드위치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KOTRA 도쿄무역관은 한국 부품 구입을 희망하는 일본 기업 40여개사를 모아 내달 중순 서울에서 '역견본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역견본전시회는 일본 기업이 원하는 부품의 세부 사양과 견본을 전시하고,공급이 가능한 한국 부품기업들과 상담을 벌이는 행사다.

또 오는 9월엔 도요타자동차의 나고야 본사에서 한국의 자동차 부품업체 50여개사가 자사의 부품을 설명하고 상담을 벌이는 행사도 가질 계획이다.

일본 부품 · 소재시장에 대한 한국 기업의 진출은 대일 무역수지 역조 개선 외에도 부수 효과가 많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용택 LG이노텍 일본사무소장은 "일본 제조업체가 부품을 구입할 때 요구하는 시험평가 데이터와 품질 기준 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까다롭다"며 "그런 벽을 넘어 실제 부품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품질관리 시스템 등 배우는 게 많다"고 귀띔했다. 일본 기업에 대한 부품 공급 자체가 한국의 부품 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경수 주일 한국대사관 상무관은 "엔고(高)-원저(低)에 따른 한국 부품의 가격 경쟁력은 일시적일 수 있다"며 "지금의 역샌드위치 효과를 한국 부품 · 소재의 품질 경쟁력을 높이고 궁극적으론 한 · 일 산업협력 관계를 깊게 만드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