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구조조정이 더디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 1월20일 건설 · 조선사에 대한 1차 구조조정 결과,D등급(부실,자금지원중단)을 받은 대주건설과 C&중공업의 처리방향이 여전히 불투명하고 C등급(워크아웃)을 받은 조선 · 건설사 중 상당수도 워크아웃 계획에 난항을 빚고 있다. 신창건설 등 일부 건설사에 대해선 평가 자체가 잘못됐다는 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에 무슨 문제가 있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IMF식(式) 처방에 대한 기억

지난해 9월 본격화된 금융위기가 실물 위기로 번지자 정부가 선제적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 기업이나 부실화될 기업들을 빨리 솎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통해 우량기업 등에 대한 금융 시스템을 복원시켜 경기 회복을 앞당기자는 논리다.

이에 대해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기업구조조정을 "재무적 어려움에 처했으나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대해 재무와 사업구조를 조정해서 기업의 회생과 채권의 회수 증대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진 위원장은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중기대출 전액 만기연장,신규대출에 대한 전액 정부 보증 등 무제한 돈풀기에 가까운 지원책을 내놓았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구조조정 대신 모든 기업을 끌고 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창용 금융위 부위원장도 IMF식(과감한 기업정리와 통폐합)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경우 암덩어리만 키우게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지금은 정부 보증이 급속한 경기위축을 막는 쿠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동규 은행연합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IMF가 내린 해법은 고금리와 과감한 기업정리,부실금융기관의 통폐합 등이었지만 지금 이 해법을 적용할 수 없다"며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금리를 올려 유동성 확산을 막고,실물 구조조정을 하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조차 10대 상업은행 중 파산처리된 곳 하나없이 정부가 부실을 메워주며 영업을 계속하도록 하고 있고,기업에 대해서도 직접 자금지원을 하는 등 IMF 처방과 정반대의 정책을 펴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위는 외환위기 당시도 30대 그룹 중 14개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망하는 바람에 뒷수습을 한,사후적 구조조정이었다면서 IMF식 처방을 따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은 불가능

정부 주도의 몰아치기식 구조조정은 실무적으로도 불가능하다. 현재 구조조정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기촉법은 채권금융사를 구조조정의 주체로 본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구조조정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다. 건설 · 조선업만 해도 정부가 은행들에 평가를 독촉했지만 어디까지나 평가의 주체는 은행이다. 주재성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채권사는 돈을 빌려줬으니 구조조정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정부는 그럴 권리가 없다"며 "정부에 구조조정 권한을 주려고 기촉법을 고친다면 위헌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고 정부의 한계를 설명했다.

은행들은 정부의 지침없이 은행 주도로만 구조조정을 하기엔 어렵다는 입장이다. 우선 구조조정엔 재무제표 등 명백한 잣대가 필요한데 모든 기업이 상장기업처럼 투명한 재무제표를 가진 게 아니다. 또 재무제표가 나오는 시기는 12월 말이다. 지난해 9월 이후 위기가 심화됐는데 이런 상황이 12월 말 재무제표엔 나타나지 않은 곳이 많다. 모 은행 부행장은 "과거 3년간 이자보상배율이 1배 이하 등의 기준으로 구조조정 대상을 선별한다"며 "몇 개 분기 동안 실적이 악화됐다고 바로 퇴출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성규 하나은행 부행장은 "외환위기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즉 예전엔 30대 기업 중 14개가 순식간에 부도났고 정신적 충격도 컸지만 지금은 기업들이 경기 악화에 대한 준비도 돼 있고 실제 망한 곳도 많지 않다는 얘기다. 대주건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대주건설은 최근 용인 지역에 지은 아파트의 입주로 조만간 자금이 유입될 것이라며 자체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채권단도 강제 퇴출 절차를 밟았다가 소송을 당할 것을 우려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복잡해진 채권단

은행들이 기업들의 재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기업들이 최근 몇 년간 호황을 누리면서 은행 돈을 많이 안썼기 때문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 발달로 기업들이 회사채 등 직접조달을 많이 하면서 채권단 구성도 복잡해졌다. 파생상품으로 인한 채권도 많다. 이성규 부행장은 "외환위기 때는 은행들만 모으면 대략 채권 80%가 모였지만 지금은 금융권역별로 다 모이다보니 이해관계가 다르고 채권단이 너무 많아 구조조정이 힘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수급환급보증(RG)보험을 가진 보험사와 은행이 대립하고 있는 C&중공업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심기/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