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적 경제위기가 닥친 후 유럽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냉정시대 동-서유럽을 갈랐던 '철의 장막'(iron curtain) 이 되살아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정치적 이념적 '장막'이었다면, 이번에는 경제적 장막일 가능성이 크다.

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정상회담에서 정상들은 세계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보호주의를 배격한다'는 원칙에 일단 합의했다. 그러나 중부와 동부 유럽 회원국의 경제위기 구제를 위한 펀드 조성 제안은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무산되는 등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 불협화음이 노출됐다.

2일 AP통신 등 외신이 전한 바에 따르면 헝가리의 쥬르차니 페렌츠 총리는 동유럽 9개국을 대표해 최대 3000억유로(약 581조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우선 1900억유로의 특별펀드 조성을 제안했다.

페렌츠 총리는 "특히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 유럽에서 가장 약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에 '철의 장막'이 다시 그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아울러 1990년대초 유럽이 재통합됐지만, 지금 재정적으로 재통합될 수 있는지 가늠하는 분수령에 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독일과 일부 동유럽 국가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일괄적인 구제방안은 현명하지 않다"며 반대의사를 명백히 했다. 그는 "중유럽과 동유럽의 국가들이 모두 같은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며 "헝가리의 암울한 상황을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도 안된다"고 못박았다.

폴란드의 도날드 투스크 총리도 "동유럽 내에는 헝가리같이 구제를 필요로 하는 나라도 있지만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처럼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있다"고 헝가리의 주장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새로운 EU가입국을 유로화로 통합시키는 문제에서도 동-서유럽은 엇갈렸다. 헝가리를 비롯해 폴란드와 발트해 3국은 유로화 통합조건을 완화하고 현재 2년으로 돼 있는 대기기간도 단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같은 요구를 독일과 네덜란드가 다시 거부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는 자국의 산업보호에 열을 올렸다. EU의 보조금 조항이 너무 엄격하니 시대에 맞게 수정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자국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추가지원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보조금은 보호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모인 유럽정상들은 모두 자국의 이익을 주장하는데 몰두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가맹국 사이의 갈등과 이기심만을 드러내고 조장하고 말았다.

유럽상공회의소의 아르날도 아브루치니 회장은 "이번 정상회담은 경제위기 해결을 위한 어떤 구체적 방안도 마련하지 못한 비생산적인 정치적 쇼였으며 회원국들 간의 우려스런 경제적 협력의 부재만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한경닷컴 차기태 기자 ramu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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