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고통이었다. 격무에 시달린다며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 것이 몇 년 전이다. 실제 힘든 일도 많다. 그런데 그런 일은 모두 '남'이 하고 있다. 소위 3D 업종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맡고 있고 식당 주방일 같은 허드렛일도 동포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일은 정말 고통일까. 왜 그런 고통의 상징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온 나라가 난리일까.

2009년 봄,우리의 화두는 '일'이다. 구조조정으로 일을 잃게 된 사람,일터가 사라져 거리에 나앉게 된 가장,일이 없어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된 대학생이 주변에 가득하다. 그들을 위해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며 신문과 방송이 나서면서 전국에 '일자리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일을 고통으로 여기는 한 이 화두는 풀 방법이 없다. 정책 당국자는 물론 개인들도 이번 기회에 도대체 일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업 문제의 해결책으로 일자리를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일자리와 취업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일자리가 없다고 해서 모두가 실업자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매달 수천 만원대의 이자 소득으로 풍요롭게 살지만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그는 우리가 걱정해야 할 실업자가 아니다. 반대로 일이 너무나 많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하는데 버는 돈은 최저 생계비를 밑도는 수준이라면 그는 안정적인 취업자라고 할 수 없다. 일할 능력은 있는데 생계가 막막한 67세 노인의 실업은 나이 때문에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위한 일자리는 만들지 않아도 되는가.

과거로 돌아가 보자.500년 전쯤인 조선 중엽에 살던 한 농부는 취업자인가, 아닌가. 또 200년 뒤쯤,즉 2200년대에는 지금의 일자리가 과연 그대로 있을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자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전업 주부의 경우는 미래에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면 우리가 지금 만들어 내려는 일자리라는 것이 일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돈'이 생기는 자리만 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돼 있다. 공공 인턴이 된 대학생들이 할 일이 없어 놀고,공무원들은 그들에게 시킬 일이 없어 귀찮아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일자리가 화두가 되면서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가 백가쟁명 식으로 나라를 달구고 있다. 일자리를 줄이지 않으면 세무 조사를 면제해 준다고 하는 정부의 정책 지원도 있고 대졸 초임을 깎아 일자리를 늘리는 방안까지 쏟아지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생각해야 하는 정부나 언론,그리고 큰 기업들로서는 당연히 가져야 할 관심이지만 여기에도 미묘한 문제가 있다. 잡 셰어링의 경우와 같이 자기 일자리를 나눠 줘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 절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일에 대한 개인들의 생각이나 철학을 정립하는 노력이 동시에 경주되지 않으면 일자리 창출 노력은 하나의 거대한 이벤트로 끝날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일을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정체성을 찾는다. '명함'과 '자리'가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일자리는 행복을 찾는 과정으로서 이해돼야 한다. '일의 철학' 같은 큰 얘기가 나와야 할 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