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 · 기아자동차 회장은 유럽 출장을 다녀온 지 2주일 만인 지난 23일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 디트로이트 LA 등의 생산 및 판매현장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다음 달 초엔 또다시 호주를 방문한다. 정 회장은 미국 출장길에 오르기 직전 기자와 만나 "미국에서 지난 달 선방했지만 재고가 많이 쌓여 걱정"이라며 "올 하반기 경기도 예측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정 회장이 이처럼 잦은 해외출장에 나서는 것은 판매 확대만이 재고를 줄이는 유일한 방안이란 판단에서다. 작년 말부터 생산 감축 및 할인판매를 개시했지만,글로벌 경기침체 심화로 악성 재고물량이 오히려 늘고 있다. 전자 및 유화,철강업체들도 재고와의 2차 전쟁에 돌입했다.


◆자동차업계,"판매 확대에 사활"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등 국내 완성차 업계는 판매 확대를 통한 재고 축소에 사활을 걸고 있다. 재고가 쌓이면 수 천억원에 달하는 신차 개발비용 회수가 늦어지는데다,고정비 지출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다음 달 노동계 춘투를 앞두고 있어 생산 감축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다.

현대 · 기아차가 갖고 있는 미국 재고물량은 5개월치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적정 재고가 통상 2~3개월치란 점을 감안하면,두 배 수준이다. 유럽 중동 등에도 악성 재고가 적지 않다.

현대차는 재고 소진을 위해 세계 최대인 미국 시장 확대에 '올인'하고 있다. 올초부터 신차 구매자를 대상으로 1년 내 실직하면 중고차를 되사주는 '현대 어슈어런스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슈퍼볼 TV중계 및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방송에도 광고를 냈다. 현대차의 아카데미상 광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8일엔 글로벌 영업본부 및 글로벌 마케팅사업부,영업기획사업부를 각각 신설했다. 판매 및 마케팅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기아차는 재고 소진이 빠른 해외 딜러들에게 인센티브를 많이 주는 방식으로 재고량 축소에 나섰다. 대신 판매가 저조한 딜러를 폐쇄하는 등 구조조정을 병행 중이다. 기아차의 미국 딜러 수는 현재 약 630개로,1년 전보다 20~30개 감소했다. 이와 함께 슬로바키아 등 해외공장 가동률을 평소보다 50%가량 낮췄다.

GM대우차는 다음 달 창원공장을 제외한 전 공장이 휴무에 들어갈 계획이다. 재고 조절을 위한 2차 감산이다. 휴무기간은 8~10일(영업일수 기준)이다.

◆철강 · 유화업계,"박리다매라도…"

포스코 등 철강회사들은 감산 외에 추가적인 재고소진 방안을 모색 중이다. 새로운 수요처를 발굴하라는 '엄명'이 떨어져 영업팀에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거래를 끊었던 업체와의 관계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포스코는 철강 반제품인 슬래브를 국내 업체에 판매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슬래브는 열연강판과 냉연강판 후판 등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중간재다. 작년까지만 해도 자체 수요를 대기에도 벅찼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국내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하기 위해 한동안 자제했던 수출전선에도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조금 싼 값에 파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물량부터 빼내고 봐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철강업체 관계자는 "올 상반기 중 철강시황이 바닥을 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런 기대가 사그라들고 있다"며 "감산 기조를 예정보다 연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화학제품의 기초원료인 나프타 가격 급락에 따른 원료 재고차손과 재고 증가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석유화학 업체들은 원료 도입 때 장기 계약 대신 스팟(단기 계약) 물량 비중을 확대하는 추세다. SK에너지,GS칼텍스 등은 중남미와 동남아 등지로 수출지역을 다변화시켜 재고물량을 털어낸다는 방침이다.

◆전자업계,"터널 끝 보이나"

삼성전자 LG전자 등 전자회사들은 작년 1차 감산으로 재고 물량을 상당부분 털어낸 뒤 LCD(액정표시장치),가전 등을 중심으로 공장 가동률을 점차 높이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가 쉽게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언제든 재고가 다시 급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TV시장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 제품 생산을 확대할 계획이다. 휴대폰의 경우 터치스크린 제품에 마케팅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LG전자는 재고를 최소화하는 한편 올해 마케팅 및 브랜드 투자비용을 늘려잡기로 했다.

조재길/안재석/이정호/안정락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