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스 "자본시장 실패"..볼커 "충격확산 속도에 놀랐다"
금융규제 필요성에 한목소리.."ATM이 유일한 혁신 성공작"


미국발(發) 금융 위기로 촉발된 세계경제 침체와 관련해 대표적인 투자자 조지 소로스(79)의 입에서 "자유시장 모델의 실패"라는 자괴적인 진단이 나오고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출신 원로 경제학자인 폴 볼커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82)도 "이렇게 빨리 충격이 확산될 줄 몰랐다"고 실토하는 등 지난 20일 밤(현지시각) 뉴욕의 컬럼비아대 주최 만찬장 분위기는 어둡기만 했다.

소로스는 기조 연설에서 "지금의 금융 위기가 대공황 때보다 실질적으로 더 심각하다는 판단"이라면서 "자유시장 모델이 실패했다고 본다"고 선언했다.

자신이 창업한 퀀텀 펀드를 통해 210억달러의 자금을 운용하는 대표적 투자자인 소로스의 입에서 자유시장 모델이 실패작이란 진단까지 나오는 아이러니가 현실화된 것이다.

소로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포함한 내로라 하는 경제학자들과 거물 금융인 등 참석자들을 향해 계속 쓴소리를 쏟아냈다.

"지금의 금융 위기가 지난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면서 "당시 본격화된 금융규제 완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주택시장 침체에서 시작된 위기가 금융 시스템 자체를 손상시키기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소로스는 "규제를 소홀히 한 금융 당국도 부분적 책임이 있다"면서 "시장 펀더멘털이란 철학도 의심받기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위기와도 성격이 다르다"면서 "금융 위기가 바닥에 도달했다는 어떤 조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지난달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했을 때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부실채권 처리 방침에 대해 "이것이 은행으로 하여금 대출을 (정상적으로) 재개토록 하는데 충분치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은행에 자본을 직접 투입하고 자본기준 여건을 완화하는 것만이 효과적인 길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금융 구제에 대한 소로스의 입장은 백악관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와 씨티그룹 '국유화'가 결국 불가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월가의 대표적 비관론자인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도 21일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에서 "결국 국유화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자신의 지론을 거듭 밝혔다.

컬럼비아대 만찬에서 연설한 볼커도 원로 경제학자로서의 참담함을 실토했다.

그는 "경제 전문가로서 상황이 이토록 심각해질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으면서 "1년 전만해도 미국은 힘들어도 세계의 나머지 지역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볼커는 "심지어 대공황 때도 지금처럼 급속히 악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되는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다른 지역의 산업생산 감소가 미국보다 빠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는 "글로벌 차원에서 움직이던 금융시장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진데 따른 파급효과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볼커는 금융위기 수습과 관련해 중앙은행과 재무 당국이 깊게 개입하면서 영향력이 강화되는데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이 커지는 상황"이라면서 "도가 지나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금융시장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했다.

볼커는 "국경을 넘나드는 대형 은행들에 대한 규제가 강화돼야할 것"이라면서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에 대한 감독의 고삐도 조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볼커는 금융시장이 그간 "혁신이란 명분으로 자율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점"을 상기시키면서 "지난 20-30년 사이 이런 혁신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것이 있다면 자동현금지급기(ATM) 정도일 것"이라고 비꼬았다.

(서울연합뉴스) 선재규 기자 jks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