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기업 도요타도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도요타가 위기에 처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은 우리 회사가 세계 1등 기업이지만 위기에 대비하지 않으면 바로 망할 수 있습니다. "

지난 18일 오후 경북 경주 대명콘도 대강당.오종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은 노조 대의원과 집행간부 등 230여명을 대상으로한 대의원 교육에서 아주 특별한 강연을 했다. 주제는 '모두가 하나 되는 희망 일터를 만들자'는 것.얼핏 보면 일상적인 주제발표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겨울엔 동굴 속에 식량을 비축해야 합니다. 외부세계가 얼어붙는 것을 알면 조금씩 쪼개 먹어야 합니다. 언제 추위(위기)가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먹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

오 위원장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 시대 흐름에 맞는 노동운동 변화와 혁신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그는 "선박가격이 계속 하락하고 해외 발주 물량도 줄어들고 있는 등 조선산업 환경이 무척 어렵다"며 고통 분담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도 투쟁과 요구보다 혁신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위기는 새벽에 도적같이 몰래 오는 만큼 노조도 혁신을 우선해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제 회사의 주인은 노사가 아니라 바로 고객"이라는 말도 몇 차례 강조했다.

1시간여 동안 진행된 강연에서 오 위원장이 내린 결론은 노조의 고통 분담이었다. 그는 "회사 경영이 어려운 만큼 노조가 고통 분담 차원에서 올 임금협상을 무교섭으로 타결지어야 한다"고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면서 "무교섭 타결이라는 한 차원 높은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을 설득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노조위원장이 노조 간부들에게 변화와 혁신을 당부하고 앞장서서 고통 분담을 선언한 것은 현대중공업 노조 사상 처음이다. 전체 노사관계에서도 아주 이례적이다.

오 위원장은 고통 분담에 나서기로 한 배경에 대해 "회사 측은 어떤 제의도 안했다"며 "다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회사 경영이 어려워져 노조가 솔선수범해 임금 동결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작년까지 14년 동안 무분규 타결을 일궈냈다. 그렇지만 매년 임ㆍ단협에 2~3개월의 시간을 허비했다. 올해는 아예 무교섭으로 임금을 동결하자는 게 오 위원장의 제안이다.

이날 참석 대의원들은 진지한 자세로 강의를 끝까지 경청했다. 일부 대의원들은 강의내용을 일일이 노트에 받아 적기도 했다. 선박 건조 분야 대의원인 김헌수씨가 "회사 중역들은 노조보다 경영을 덜 걱정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자 오 위원장은 "경영진의 태도가 맞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런 뒤 "경영진은 회사가 내일 망해도 이상 없다고 말해야 한다"며 "만일 신용이 떨어져 주가가 하락하면 회사 채권을 발행할 때도 등급이 달라진다"고 설득했다.

이 회사 김종욱 상무는 "임금 동결은 물가 상승분 등을 감안하면 실제 임금이 깎이는 셈인데 노조위원장이 이를 제의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노동운동을 투쟁이나 대립보다 상생의 문화로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오 위원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불법 과격 파업을 벌여 회사 측으로부터 해고를 당했으며 16년 만인 2003년 현대중공업에 다시 복직했다. 회사 측이 얼마 전 타개한 권용묵 전 노조위원장,오 위원장 등 5명의 해고자를 '복직 절대 불가 5인방'으로 꼽았을 정도로 강경한 인물이었다.

경주=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