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와 언론에는 미국 경제가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져들고 있기는 하지만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을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정부가 금융부문의 부실 정리에 미적거렸던 일본과 달리 미국은 정책금리를 급격히 낮추고 금융부문의 부실정리를 위해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한편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펼치기로 한 점 때문에 실패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미 재무부가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하고도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이 계속되는데다, 대형 은행들 가운데 일부는 국유화 이외에는 회생 전망이 불투명한 지경이며, 실업률 급등과 소비 위축 현상이 계속되면서 미국이 오히려 일본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추락할 수 있다는 전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이 최근 발표한 작년 4.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3.3%를 기록, 74년 오일 쇼크 이후 최악의 실적을 보였다.

연율로 환산하면 -12.7%에 해당돼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파를 던져줬다.

작년 4분기 성장률이 1년간 지속된다고 가정할 경우 연간 성장률이 -12.7%라는 의미다.

그러나 미국의 지난해 4분기 GDP 성장률은 전기대비 -3.8%였으며 연율로 환산하면 일본보다 더 낮다.

경기하강의 속도면에서 미국이 일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셈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달 9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경기부양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단호하고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은 결과"라면서 일본을 "따라해서는 안될 사례"라고 꼽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경기부양법에 서명한 17일 다우지수는 금융주들이 급락하면서 300포인트 가까운 폭락세를 보였다.

미 정부의 과감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심리는 갈수록 얼어붙는 양상이다.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일본의 90년대 경기부진이 단지 정책적 오류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며 과도한 차입에 따른 거품붕괴가 근본원인이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금융위기의 발생원인과 이후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일본의 90년대 위기보다 더 심각한 상태를 보이고 있으며 문제 해결이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이 90년대 은행부실이 절정에 달했을 때 부실대출의 규모가 GDP의 35%에 달했다.

골드만삭스는 미국 은행들이 안고 있는 부실대출이 5조7천억달러에 달해 GDP에 4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 국가들과 일본은 수출호조로 경기회복에 큰 도움을 받았지만 현재 미국은 글로벌 경기침체로 전세계 무역규모가 위축됨으로써 수출을 통한 돌파구를 찾는 것이 봉쇄돼 있다는 점도 일본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미국의 금융부분의 위기는 감독당국의 규제를 받는 시중은행뿐만 아니라 헤지펀드.투자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각종 파생상품을 이용한 과도한 대출로 부실이 커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미 재무부가 시중은행을 국유화하고 부실을 정리한다고 하더라도 금융시장의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과거 스웨덴과 일본이 금융위기를 겪었을 때 정부 주도로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은행간 합병을 유도한 후 대형 은행 몇몇만 제대로 `관리'하면 시장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던데 반해 미국은 그동안 정부 주도의 합병에도 불구하고 `관리'해야할 주요 대형은행이 10여개에 달한다는 점도 문제해결을 어렵게 하는 대목이다.

위기의 원인이 됐던 거품의 형성과정도 미국과 일본은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80년대 거품형성기에는 기업들의 과도한 차입이 문제가 됐지만 미국은 주택을 담보로 한 가계의 과도한 대출이 주원인이다.

기업의 부실은 상대적으로 타깃 범위가 좁고 구조조정도 상대적으로 용이하지만, 가계의 부실은 범위가 엄청나게 넓고 구조조정 작업도 훨씬 까다로우면서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험도 뒤따른다.

가계의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부실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가계는 소비를 극도로 줄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GDP의 70%를 차지하는 소비부분은 계속 위축되고 따라서 성장률 반등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일본이 90년대 거품붕괴에 따른 부실을 정리하고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확대한 결과 정부의 총 부채는 GDP 대비 80%까지로 늘었다.

현재 미국의 국가채무는 10조8천억달러로 GDP의 60%를 넘어섰다.

미국의 올해 회계연도 재정적자는 1조6천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빚 규모는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일본의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을 미국이 깨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sh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