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거쳐 인력구조 업그레이드..회복기 '총공세' 준비

불황으로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대규모 감원·해고에 나서는 가운데 삼성과 LG 등 한국 대표기업들만 유독 "인위적 인력 구조조정은 없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국내 주요 기업들이 외환위기 등을 거쳐 지난 10여년간 꾸준히 사업·인력 구조조정을 해온데다, 경쟁력 우위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경기 회복기의 큰 '도약'을 준비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 고용안전망이 취약한 상황에서 '마지막 보루'격인 대기업이 쉽게 일자리를 줄일 수 없는 한국만의 정치·사회적 특수성도 거론됐다.

그러나 앞으로 환율 그래프가 아래로 꺾일 경우, 한국도 더는 감원의 '피바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 외신들 "한국만 감원 없이 어떻게 버티나"

15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11일 삼성그룹 고위관계자는 사장단 회의 직후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앞서 9일 남용 LG전자 부회장도 간담회에서 "국내 인력의 경우 사람을 회사 밖으로 내보내는 인위적 구조조정은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고, 작년 말과 올해 초에 걸쳐 자금 수혈을 받은 하이닉스조차 임직원 임금 삭감과 연차휴가 사용 등을 통한 잡쉐어링(일자리나누기)으로 국내 인력 감원 없이 버틴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연말 SK그룹과 롯데그룹 역시 구조조정 계획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에서만 하루 7만명의 감원이 발표된 지난달 26일 '피의 월요일'에 이어 소니.파나소닉.NEC.히타치 등 일본 주요 전자업체들도 7천~2만명의 대규모 해고를 서두르는 상황에서 '감원 무풍지대' 한국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LG전자 남 부회장의 기자 간담회에서도 "왜 한국 기업만 감원이 없을 수 있나", "감원 없이도 정말 문제가 없느냐"는 외신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 삼성·LG 생산직 비중 30% 밑으로..R&D 중심 재편 성공

업계는 무엇보다 한국 기업들이 외환위기와 카드사태 등 호된 '매'를 먼저 맞는 과정에서 인력 구조조정이 대부분 선제로 이뤄진 점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고 있다.

빼야 할 '군살'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한국 1위 기업 삼성전자의 경우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전체 인력 8만3천명의 무려 28%인 2만3천명(국내 5만8천명, 해외 2만5천명)을 줄인 바 있다.

이런 대규모 인력 감축은 당장 이익이 나더라도 장래성이 없는 120여개 사업을 과감히 정리한 데 따른 것이다.

그 결과 현재 국내 생산인력은 LCD.반도체 등 손에 꼽을 수 있는 소수 분야에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연구·개발(R&D)이나 마케팅, 디자인 등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분야에 집중 배치돼 있다.

실제 삼성전자 사업보고서 등 내부 통계를 보면 2008년 현재 생산직은 2만4천100여명으로 전체 국내 인력에서 약 28%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2004~2005년 탕정·기흥 등 대규모 반도체·LCD 설비투자와 함께 외환위기 전후 줄어든 생산직의 절대 규모가 다시 늘었음에도 그 비중은 1998년(32%)보다 오히려 낮아진 것이다.

대신 R&D.마케팅.영업.디자인 인력 비중은 작년 현재 약 61%로 98년의 46%에 비해 크게 늘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꾸준한 구조조정과 함께 생산직 인력 운용이 매우 '빡빡하게' 이뤄져 왔기 때문에 현재도 과잉 상태라고 볼 수 없다"며 "더구나 위기 극복과 경기 회복기를 고려하면 R&D.디자인.영업인력을 줄이기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LG전자도 마찬가지다.

현재 생산의 60%가 해외에서 이뤄지면서, 국내 인력 2만9천600명 가운데 30%인 8천900명 정도만 제조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머지 2만700명은 연구·개발(R&D)직 및 사무직이고, 그중에서도 절반 이상인 1만900명이 R&D에 종사하고 있다.

외환위기 직전 1997년과 비교해 생산직 비중이 LCD 분사 등을 거쳐 46%에서 30%로 급락한 셈이다.

남 부회장 역시 핵심 역량에 해당하는 R&D 분야 등의 인력에 대해 "해고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다만 LG전자는 현업 R&D.사무직 2만명 가운데 20%를 신성장동력에 투입하는 인력 재배치를 통해 효율성을 높일 계획이다.

◇ 경쟁력 자신감도 반영..'환율'이 최대 변수

아울러 이들 기업이 가능한 사람을 내보내지 않고 버티는 것은 향후 도래할 '좋은 날'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경쟁력이 세계 정상권인 만큼, 당장 이 위기만 넘기면 경기 회복기에 오히려 시장 주도권을 굳힐 수 있다는 판단이다.

당장 어렵다고 숙련된 인력을 쉽게 내보냈다가 정작 경쟁업체와의 격차를 키울 '기회'가 와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인력을 운용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시장조사 기관들의 잠정집계 결과 지난해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하이닉스 두 한국업체의 점유율은 49.7%로 작년보다 0.7%포인트 늘었고, 삼성전자와 LG전자의 LCD TV 역시 불황임에도 1년 새 점유율이 25.5%에서 30%로 높아졌다.

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에서 대규모 감원 소식이 없는 것은 앞서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이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고, 다른 해외 업체들보다 경쟁력 측면에서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와는 달리, 현재 우리 대표기업들은 경쟁구도에서 칼자루(주도권)를 쥐고 있는 상황이라 불황이라도 상대적으로 공격하기에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며 "사람을 줄이지 않는 것은 경기 여건 호전과 함께 총공세에 나설 때를 대비, 힘을 비축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일단 지난 수 년 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의 실적이 좋아 아직은 재무구조가 해외 업체들보다 건전한데다, 외환위기를 통해 미리 구조조정을 거쳐 인력 감원 필요성이 크지 않다"며 "우리 외환위기 당시 호황이었던 선진국 기업들은 이제야 구조조정을 경험하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유 상무는 "아울러 사회적 안전망이 선진국보다 미흡하기 때문에 대기업은 쉽게 사람을 자르지 말고 버텨줘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 의식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환율 조건이 나빠질 경우, 우리 기업들도 더는 인력 구조조정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 위원은 "현재 한국 기업을 지탱하는 것은 기술력과 환율(원화 절하)인데, 환율이 지금까지와 달리 떨어질 경우(원화 절상) 국내 기업들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남 부회장도 "환율 거품이 꺼지면 또 구조조정이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까지 (구조조정을) 안 하고 넘어가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나마 원화 값이 떨어져 수출 시장에서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를 상쇄하고 있으나, 환율마저 불리하게 돌아가면 천하의 삼성이나 LG도 당장 살기 위해 '감원'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기자 shk99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