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올 사업 계획을 가까스로 확정한 A그룹은 요즘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작년 실적을 토대로 연간 경영계획의 윤곽을 잡았지만 채 한 달도 안돼 예측보다 더 형편없이 경영 상황이 꼬여 버려서다. A그룹 관계자는 "생산 판매 등 주요 월간 경영지표가 목표대비 90~110% 정도를 유지해야 사업 계획의 의미가 있는데 정작 1월 실적을 살펴보니 50%도 채 안됐다"며 "한 달도 넘기지 못하고 계획을 다시 짜야할 판"이라고 전했다. 삼성 현대 · 기아자동차 LG SK 등 주요 대기업들은 연간 단위 경영계획 수립을 사실상 포기했다. 사업 계획없이 위기상황에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는 '패스트 트랙(신속 대처)' 경영에 나설 움직임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많은 대기업들이 사실상 연간 사업 계획을 포기했다"며 "기업인들 사이에선 하루 벌어 하루를 때우는 일수(日收)경영을 할지도 모른다는 자조마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초단기 계획'으로 버틴다

삼성전자는 올해 연간 단위 경영 계획 수립을 사실상 포기했다. 지난달 28,29일 이틀간 경영전략회의를 가진 세트(DMC) 부문은 국가별,사업부별로 시급한 현안만 정했을 뿐 연간 목표 등은 내놓지 않았다. 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 등 부품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도 이달 중순께 경영전략회의를 가질 예정이지만 환율,유가,금리 등 대외변수가 너무 많아 연간 투자 목표를 내놓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예측하기 어려운 글로벌 상황에 따라 수시로 계획을 바꾸기 보다 매출과 이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마다 직접 챙기는 현장 중심 전략에 치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대 · 기아차는 올해 국면별 · 시장별로 적합한 분기별 계획만을 세우고 이에 맞춰 글로벌 생산 기지의 생산과 판매를 탄력 조정할 계획이다. LG전자도 월단위로 매출과 영업이익률,시장점유율,현금흐름 등을 파악하고 목표를 설정해 나가는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다.

SK그룹도 계열사별로 1~2개월 단위의 경영목표를 세워 위기 상황에 대처해 나가기로 했다. 그나마 연간 계획을 세운 포스코도 작년보다 2~12% 줄어든 매출 목표 범위만 두루뭉술하게 잡았을 뿐이다.

◆해외전시회 참가,출장 절반으로 줄여

연간 사업계획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기업들은 생존의 관건이 될 현금 유동성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체면치레식으로 나가던 해외 전시회 참가를 줄이고 임직원들의 해외 출장도 절반 이상 축소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SK 관계자는 "계열사별로 확실한 바이어가 있는 곳의 전시회에만 참가하고 불필요한 해외 출장도 대폭 축소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업체나 전자업체들도 올해 열리는 해외 및 국내 전시회 참가폭을 대폭 줄이거나 불참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기업들이 대다수 소모성 비용 처리를 사후결제로 바꾸면서 일상적인 마케팅이나 판촉 활동도 크게 위축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연간 자금 계획을 마련하지 못하다 보니 기업마다 현금 흐름 관리에 피를 말리고 있다"고 전했다.

◆부품업체에도 불똥

대기업들의 사업 계획이 표류하면서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1월 현대자동차는 생산계획을 세 차례나 변경,부품업체들에 통보된 1월분 부품 발주량도 같은 횟수만큼 바뀌었다. 자동차 부품업체 A사 관계자는 "당초 약속한 물량의 절반만 가져간 부품이 있는가 하면 일부 품목은 납품 기일 직전 밤을 새워 물량을 메워야 했다"고 설명했다.

신규 설비 투자나 기존 시설에 대한 보수 작업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B사 관계자는 "과거에는 완성차 업체의 연간 사업을 보고 이에 맞춰 중장기 설비투자를 할 수 있었지만 올해는 가이드라인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나 LG전자에 부품을 납품하는 전자업계 부품업체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TV와 디스플레이 부품을 생산하는 C사 관계자는 "당장 1~2주 후에 어느 정도의 물량을 준비해야 할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라고 하소연했다.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구직자들도 사업 계획 표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삼성 · 현대기아차 · LG · SK 등 4대 그룹은 경기회복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될 것으로 예상되는 3월 이후에나 채용 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라 취업 준비자들의 혼선이 불가피해졌다.

김태훈/송형석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