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양적 완화 정책의 본격적인 시행을 위한 수순을 밟아가는 듯한 인상이다.

28일 FRB의 금리결정 기구인 연방 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예견됐던 대로 정책금리를 연 0∼0.25% 수준에서 그대로 유지키로 결정하는 한편 신용경색 현상의 해소를 위해 장기물 국채의 직접 매입을 통한 양적 완화 정책의 시행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FOMC는 지난달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출 당시 "장기국채 매입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힌데 이어 이달에는 "장기국채를 매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혀 표현의 수위를 높였다.

제로 수준인 정책금리를 더 이상 낮추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FRB로서는 실탄이 사실상 소진된 상태다.

전투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백병전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다.

FRB는 지금까지는 국채를 담보로 잡고 금융회사들이 보유한 모기지 채권 등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금융시장에 자금을 공급해왔으나 신용 경색 현상은 풀리지 않고 장.단기 금리의 격차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금융회사들은 FRB로부터 공급받은 자금을 대출재원으로 쓰지 않고 긴급한 부채 상환이나 비상상황에 대비한 여유자금으로만 쌓아두고 있어 자금중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며, FRB가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낮췄지만 일반 소비자들과 기업들이 융통할 수 있는 금리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이에 따라 FRB는 초강경 대응책으로 금융회사들이 보유한 장기물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방식으로 통화량을 무제한 공급하는 정책, 즉 양적 완화 정책을 시행하는 것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이달 13일 런던정경대 행사에서의 연설을 통해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췄지만 경제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들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 시장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양적 완화와 같은 초강경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버냉키 의장의 이러한 발언은 양적 완화 정책의 시행이라는 백병전에 뛰어들기 전에 FRB의 강력한 힘을 의식한 시장이 먼저 고개를 숙이기를 기대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금융시장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편이다.

이날 FOMC가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표결에 참석한 9명의 위원 가운데 제프리 래커 위원 혼자 반대표를 던졌다.

래커 위원은 금리를 현 수준에서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에 맞춰 통화정책을 펼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현 시점에서는 FRB가 국채의 직접 매입을 통해 자금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 온건한 내용의 성명 채택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양적 완화 정책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신용경색 현상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다음번 개최될 FOMC 회의에서는 양적 완화의 시행을 주장하는 위원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FRB로서는 가급적이면 양적 완화 정책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위기가 수습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일본이 양적 완화 정책을 폈다가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자산거품 현상만 키운 전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양적 완화 정책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신용경색을 해소하고 장단기 금리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통화량 공급을 늘리는 것이 해법일 수는 있지만, 통화량의 과도한 팽창은 결국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자산가격의 거품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양적 완화 정책을 옹호하는 진영에서조차도 "양적 완화 정책의 성패는 경기가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되는 가장 이른 시점에 이 정책에서 재빨리 탈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위기 수습을 위해 통화량을 충분히 공급하되, 과도한 통화량이 문제를 야기하지 않도록 최적의 시점에 이를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최적의 시점을 언제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통화정책 당국에게는 간단찮은 문제다.

너무 빨리 통화량 흡수에 나서면 되살아나려는 경기를 다시 고꾸라지게 만들 수도 있고, 너무 늦게 흡수하다 보면 또 다른 자산버블 현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각한 침체에 빠진 미국 경제를 감안하면, FRB가 폐단을 충분히 알면서도 무리한 수를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대공황과 유사한 상태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중병에 걸린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온갖 극약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부작용과 후유증을 미리 걱정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사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이 풀리지 않는다면 FRB가 양적 완화 정책을 펴는 것은 시간문제와 다름없어 보인다.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shpark@yna.co.kr